가솔린 100년 패권 붕괴…전기차 캐즘 조기 종료? [자동차 시장 대격변]

입력 2026-10-19 08:43
수정 2026-10-19 08:45
[커버스토리 : 자동차 시장 대격변 '키워드5' : 대세는 ‘친환경’]


최근 증권가 완성차 애널리스트들의 리포트 제목이 일제히 달라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 리포트를 도배했던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정체)이라는 단어 대신 ‘유럽 전기차 성장세’, ‘테슬라·K배터리 성장 전환’과 같은 낙관적 키워드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시장에는 전기차 캐즘이 2028년까지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당초 예상보다 더 빨리 캐즘이 끝나고 ‘2차 상승 국면(2nd Wave)’에 진입했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가솔린 점유율 사상 첫 50% 미만신호탄은 글로벌 신차 판매 비중에서 터져 나왔다.

10월 1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자동차산업 분석기관 모빌리티 글로벌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올해 상반기(1~6월) 전 세계 순수 가솔린차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0% 감소한 2025만 대에 그쳤다. 전체 신차 중 가솔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년 동기보다 3%포인트 감소한 49%로, 1920년대 자동차 대중화 시대가 열린 이후 사상 처음으로 50% 벽이 무너졌다. 2021년 73%에 달했던 가솔린차 점유율이 단 5년 만에 붕괴된 셈이다.


가솔린차의 주도권 상실을 이끈 것은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른 고유가와 유류 공급 불안, 이에 맞물린 전기차(EV)의 유지비 매력 재평가다. 올해 상반기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2% 증가한 687만 대를 기록하며 신차 점유율을 17%까지 끌어올렸다. 보조금 축소 여파로 미국(-15%)과 중국(-3%) 등 일부 시장이 숨 고르기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유럽(1811만 대, +32%)을 비롯해 동남아시아(+81%), 오세아니아(+120%) 등지에서 가파른 폭발세가 나타나며 전체 시장을 견인했다.

현장의 글로벌 완성차 경영진도 캐즘 종식을 공식화했다. 호세 무뇨스 현대자동차 대표이사(CEO) 사장은 지난 8월 26일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더 이상 캐즘은 없다고 보고 있다. 단지 지역별 속도 차이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만식 볼보자동차코리아 전무 역시 최근 기자들을 만나 “전기차 캐즘은 이미 지났다”며 “전기차를 경험한 소비자가 늘고 경험치가 쌓이면서 시장 전망도 밝아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수치도 이를 뒷받침한다. 8월 한 달 유럽 전기차(BEV+PHEV) 판매량은 전년 동월 대비 23.0% 증가한 33만5000대로 침투율 40.2%를 기록, 처음으로 40% 고지를 돌파했다. 한국은 8월 누적 판매량이 15만4000대로 전년 동기 대비 76.0% 폭증하며 미국, 중국, 유럽 등 주요 글로벌 시장 중 가장 가파른 회복세를 증명했다.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은 8월 전기차 판매량(101만4000대)이 소폭 감소했으나 침투율은 여전히 65.2%에 달해 견조한 하방 지지력을 보였다. 보조금 철회 여파를 맞은 미국은 전기차 비중이 3.0%포인트 감소했지만, 테슬라 ‘모델Y’(8월 2만8000대)가 단일 차종 최다 판매를 유지하며 시장을 받치고 있다.

당초 자동차 업계와 증권가에서는 전기차 캐즘이 최소 2027~2028년까지 장기화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지배적이었다. 초기 얼리어답터 중심의 구매가 일단락된 후 대중 소비자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비싼 몸값과 짧은 주행거리, 부족한 충전 인프라라는 벽을 넘기가 단기간에는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예상을 깨고 캐즘의 벽이 급격히 허물어진 결정적 원동력은 시장의 예측보다 훨씬 빠르게 무너진 ‘가격 장벽’에 있었다. 전기차 몸값의 핵심인 배터리 가격 하락세가 결정적이었다. 블룸버그NEF 집계 결과 지난해 BEV용 배터리팩 평균 가격은 kWh당 99달러까지 떨어지며 2년 연속 100달러 밑을 유지했다. 2022년과 비교하면 불과 3년 만에 28.3%나 낮아진 셈이다. 여기에 가성비를 앞세운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채택 확대와 셀투팩(CTP) 기술혁신이 결합하면서 전기차 제조업체들의 제조 원가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미국 시장에서 2020년 4만3895달러부터 시작했던 포드 머스탱 마하-E의 가격은 최근 3만7795달러로 약 14% 저렴해졌다. 기아 EV6의 시작가도 4만900달러에서 3만7900달러로 내렸고 현대차 아이오닉5 역시 3만5000달러 선부터 구매가 가능해졌다. 2022년 6만달러를 훌쩍 넘었던 테슬라 모델Y를 비롯해 한때 ‘비싼 차’의 대명사였던 전기차가 미국 시장에서 3만달러대 SUV까지 선택지를 넓힌 것이다.

이 과정엔 역설적으로 중국의 ‘공급과잉’이 캐즘 조기 종식을 끌어당긴 결정적 촉매제로 작용했다. 중국 배터리·완성차 기업들이 생산 능력을 공격적으로 확대하며 쏘아 올린 공급과잉은 글로벌 자동차 시장 전체를 흔드는 대파동이 됐다.

BNEF 분석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평균 배터리팩 가격은 중국이 kWh당 84달러로 가장 낮았으며 북미는 중국보다 44%, 유럽은 56%나 비쌌다.

중국의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이 해외로 전파된 대표적 사례가 BYD의 ‘돌핀 서프(Dolphin Surf)’다. 유럽 출시 가격을 2만2990유로로 책정한 데 이어 출시 프로모션을 통해 1만9990유로까지 가격을 낮추자 당시 로이터 등 외신은 “중국산 저가 EV가 유럽 완성차 업체들에 강력한 가격 인하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중국발 ‘가격 파괴’ 공세에 위기감을 느낀 유럽 레거시 업체들도 속속 2만유로대 전기차 출시로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폭스바겐은 2만4995유로부터 시작하는 ID. 폴로(Polo)를 선보였고 르노 역시 르노5를 2만5000유로부터 책정하며 맞대응에 나섰다.


중국 배터리·완성차의 영토 확장은 거센 물량 공세에 기반한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중국의 자동차 수출은 2020년 108만 대에서 연평균 50% 이상 급성장해 올해 1200만 대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임은영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현재 글로벌 신차 3대 중 1대 이상이 중국 차”라고 분석했다. BYD, 지리자동차 등 중국 브랜드가 압도적인 가성비를 앞세워 영토를 넓히자 테슬라와 레거시 완성차 기업들도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출혈을 감수하고 가격 인하와 판매 인센티브 확대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종규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중국 전기차의 약진은 글로벌 (공급망의) 지각변동을 촉발하는 대파동”이라며 “2025년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 톱10 중에서 전기차 보급률 상승과 함께 2023년 대비 판매량이 증가한 기업은 비 중국 기업은 토요타(+9.8%)가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이 기간 중국 메이커 BYD와 지리가 각각 52.3%, 143.8% 성장한 반면 폭스바겐 -2.8%, 스탈란티스 -14.2%, 혼다 -17.4%의 역성장을 보였다. 과도기 수요 흡수하는 ‘하이브리드 쇼티지’ 그러나 시장 주도권이 순수전기차(BEV)로 순식간에 넘어가지는 않는다. 충전의 불편함과 겨울철 방전·화재 불안은 물론 나중에 중고차로 팔 때 제값을 받지 못하는 ‘가격방어 실패’에 대한 우려 탓에 순수전기차 구매를 주저하는 소비자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시장 지형은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HEV)의 균형점을 새로 찾는 양상이다. 전기차 급반등 속에서도 여전히 견조한 초과수요를 형성하고 있는 ‘하이브리드 쇼티지(공급 부족)’ 현상이 대표적이다.

8월 글로벌 HEV 판매량은 80만5000대로 전년 동월 대비 5.0% 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미국(+21.0%)과 일본(+1.0%)이 성장을 이끈 반면 유럽(-10.0%)과 한국(-19.0%)은 전기차 수요 회복 영향으로 하이브리드차 판매가 감소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미국 등 주요 시장에서는 하이브리드 인기 차종의 인도 대기 기간이 수개월에 달할 정도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충전 인프라 부족이나 배터리 성능 저하를 우려하는 소비자들에게 하이브리드는 여전히 가장 확실한 대안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고유가 기조와 원재료비 인플레이션 압력이 더해지면서 유류비에 민감한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하이브리드 수요 쏠림이 한층 심화됐다. 미 당국의 친환경차 세제 혜택 조정 이후 전기차 수요 일부가 하이브리드로 이탈한 점도 초과수요를 부추긴 요인이다.

문제는 전기차와 달리 선진 시장에 하이브리드 모델을 즉각 유연하게 공급할 수 있는 완성차 메이커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완성차 업계는 주문 대기가 쌓이는 HEV 초과수요를 얼마나 신속하게 흡수하느냐가 하반기 실적 방어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신윤철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지난 5월 하반기 전망 보고서를 통해 “하반기에 고유가 현상 지속과 주요 시장 BEV 구매 보조금 예산 소진 시점이 중첩될 경우 신차 수요가 HEV에 집중되면서 초과수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쇼티지’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점이며 HEV 역할론이 대두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장에선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투트랙’ 전략을 고도화해 온 현대차그룹이 이 같은 ‘하이브리드 쇼티지’ 국면에서 반사이익을 누릴 것으로 전망한다. 신 애널리스트는 “기존에는 HEV를 크게 선호하지 않았던 미국 시장조차 HEV 침투율 상승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며 “혀대차그룹은 미국 내 초과수요가 기대되는 HEV 현지 생산을 확대함으로써 올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미국 HEV 시장의 압도적 1,2위인 도요타, 혼다의 점유율을 가져오기 시작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기차 급반등과 하이브리드 품귀 속에서 완성차 업계가 꺼내든 또 다른 카드도 있다.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다. 전기모터로만 바퀴를 굴리되 소형 엔진을 발전기로 활용해 배터리를 충전하는 방식이다. 순수전기차보다 배터리 용량을 크게 줄여 원가를 낮추면서도 충전 부담과 주행거리 불안을 덜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EREV는 2010년대 GM 쉐보레 볼트와 BMW i3 REX 등을 통해 등장했지만 높은 가격과 애매한 시장성 탓에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전기차로 가는 길목에서 ‘파묘’되듯 다시 돌아왔다. 중국에서는 2024년 EREV 판매량이 약 120만 대로 전년 대비 79% 급증하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현대차그룹도 EREV 시장에 뛰어든다. 현대차는 2027년 상반기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생산하는 싼타페 EREV를 시작으로 북미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1회 충전·주유로 600마일(약 966km) 이상 주행을 목표로 한다.

다만 EREV의 최근 중국 내 판매 증가세가 둔화하고 있어 장기적인 시장성과 대세 안착 여부는 여전히 검증 과제로 남아 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