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인쇄회로기판(PCB)산업은 스마트폰과 PC 등 전통 정보기술(IT) 기기 수요가 꾸준히 증가한 2022년까지가 전성기였다. 이후 글로벌 경기 둔화와 전방 산업 부진에 하락세가 이어졌다. 한동안 침체가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는데 올해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인공지능(AI) 열풍을 타고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면서다. 촘촘한 회로를 구현한 고부가가치 기판이 AI 시대의 핵심 무기로 떠올랐고, PCB업계는 제2의 호황을 맞이했다. 삼성전기, LG이노텍 등 주요 대기업은 물론 중소업체까지 일제히 고부가 기판시장에 뛰어들고 증설 경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물량 대신 고부가로 승부”4일 관세청에 따르면 올 1~8월 PCB 수출은 35억6300만달러(약 4조8100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14.4% 늘었다. 최근 추세를 감안하면 올해 연간 수출액은 역대 최대치인 2022년 59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눈에 띄는 대목은 수출 물량 자체는 크게 늘지 않았다는 점이다. PCB 수출량은 작년 1~8월 1만1206t에서 올해 같은 기간 1만1411t으로 1.8% 늘어나는 데 그쳤다. 물량은 거의 늘지 않았음에도 수출액이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한 건 단가가 비싼 고부가 기판 판매량이 집중적으로 늘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기판 가격 자체가 오른 영향도 있다.
PCB는 반도체 등 전자부품을 고정하고 부품 간 전기 신호가 오가도록 하는 기판이다. 반도체를 전자부품의 ‘뇌’라고 한다면 PCB는 뇌의 신호를 전달하는 일종의 ‘신경망’ 역할을 한다. 올해 들어 AI 서버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반도체와 함께 PCB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장 부활을 이끈 일등 공신은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가 꼽힌다. FC-BGA는 기존 기판보다 전력 손실을 줄이면서 대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고성능 기판이다. 삼성전기는 주요 빅테크를 상대로 내년 FC-BGA 물량 계약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LG이노텍도 여러 빅테크와 장기공급계약(LTA)을 논의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서버 성능을 좌우하는 고다층기판(MLB)도 AI 붐을 타고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MLB는 기판을 여러 겹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능력을 높인 고난도 제품이다. 업계 3위인 이수페타시스는 통신 장비에 들어가는 중다층기판 대신 AI 가속기용 MLB 생산 비중을 늘리며 구글, 엔비디아 등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중소 업체까지 증설 경쟁에 가세중소·중견 기업도 잇달아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덕전자는 지난 6월 AI 데이터센터용 FC-BGA 양산에 처음 들어갔다. 메모리 모듈 PCB 1위인 심텍은 최근 4000억원을 투자해 충북 청주 공장 증설에 나서며 저전력 메모리 소캠(SOCAMM)용 PCB 전용 라인을 넓히고 있다. 경쟁사인 티엘비와 코리아써키트 등도 차세대 고성능 기판 개발과 생산 비중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장 전망도 밝다. 시장조사업체 프리스마크에 따르면 글로벌 PCB시장은 지난해 852억달러에서 2030년 1233억달러로 커질 정도로 성장성이 크다. 업계 관계자는 “단순 생산 물량 증가보다 고부가 제품 중심의 포트폴리오 재편이 기업의 실적을 견인하고 있다”며 “기술 경쟁력이 곧 회사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잣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종환 기자 won04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