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은 한국 야구의 민낯을 보여줬다. 프로 선수로 이뤄진 한국 야구팀은 예선 2차 리그격인 슈퍼라운드에서 전원 실업 선수로 짜인 일본 대표팀에 0-5로 완패했다. 비록 결승전에서 설욕에 성공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일본에 비해 빈약한 한국 야구의 저변을 드러낸 빛바랜 승리였다.
기초가 약하면 언제든 쉽게 무너지는 건 경제도 마찬가지다. 반도체가 이끄는 요즘 한국 경제도 남의 일이 아니다. 얼핏 보면 지금 한국 경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다.
반도체는 인공지능(AI) 투자 붐을 타고 초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 3분기 영업이익이 100조원을 넘었다고 한다. 전 세계 기업 중 최대 수준이다. 2분기 89조원대 이익도 놀라웠는데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번 것이다.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이익이 꾸준히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SK하이닉스 역시 역대급 이익이 예상된다. 반도체 특수는 한국 경제를 밀어 올리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한국의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을 2.6%에서 3.7%로, 내년 전망은 1.9%에서 2.6%로 높였다. 올해 상향 폭은 주요 20개국(G20) 중 1위다.
그렇다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다. 화려한 ‘헤드라인 성장률’ 뒤에 가려진 경제의 기초 체력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 성장률은 지난해 1.85%에서 올해 1.66%, 내년엔 1.52%로 떨어진다. 1997~2007년 평균 5%를 넘던 잠재 성장률이 어느덧 1%대 중반까지 미끄러졌다. 이대로 가면 2040년께에는 0%대로 추락할 것이란 국책 연구소 전망이 나온 지도 오래다.
반도체와 일부 수출산업을 빼면 찬바람이 부는 곳이 많다. 한국은행 조사 결과 지난해 외부감사 대상 기업 중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기업이 39.9%에 달했다. 2013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고였다. 3년 연속 그런 상태에 빠진 한계기업은 5632곳으로 전체 외감 대상의 19.1%였다. 전년 대비로는 707곳 늘었다. 석유화학, 철강, LCD 등 주력 산업 상당수는 중국에 밀려 구조조정 대상이 되거나 주도권을 잃고 있다.
미국·이란 전쟁에 따른 고유가와 세계적인 금리 인상으로 경제 여건은 살얼음판이다. 한때 9000을 넘던 코스피지수가 7000 밑으로 떨어진 것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반도체 착시에 취해선 안 되는 이유다. 게다가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반도체가 첨단산업과 국가안보의 핵심으로 인식되면서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 부활을 위해 칼을 갈고 있다. 한국 반도체의 최대 구매자인 중국도 창신메모리(CXMT)와 양쯔메모리를 앞세워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
기초 체력을 키우지 않으면 우리 경제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반도체 초격차를 유지하는 동시에 AI 시대를 이끌 로봇, 원전 등 주요 산업에서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저출생·고령화 시대에 맞게 사회 시스템도 손봐야 한다.
그런데 이런 개혁은 더디기만 하다. 특히 노동·연금 개혁은 하세월이다. 반도체 연구인력과 고소득 화이트칼라에 한해서만이라도 주 52시간제 예외를 인정하는 작은 개혁조차 몇 년째 진전이 없다. 정부가 호남 반도체 등 메가 특구에 한해 예외 적용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노동계 반대에 막혀 시점을 기약하기 어렵다.
기초연금 개혁은 올해도 무산됐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하후상박식 개혁을 주문하고 보건복지부도 소득 하위 70%인 수급 기준을 바꾸려고 했지만 수급 기준은 손도 못 댄 채 소득 하위 30%에 월 3만원, 30~45%에 월 9000원을 더 주는 ‘돈풀기’로 끝났다. 저소득층을 두텁게 지원하면서 미래세대의 부담을 줄이자는 취지가 무색해졌다. 지지율 하락을 의식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규제 개혁도 역대 정부에서 구호에 그칠 때가 많았다. ‘타다’와 ‘로톡’처럼 낡은 규제에 막혀 혁신이 힘을 잃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이번 정부는 다를까.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라고 하지만 사이클은 언젠가 바뀐다. 반도체 호황의 과실을 누리는 지금 꼭 필요한 개혁을 하지 않으면 나중엔 더 하기 어렵다. 그때 가면 우리 경제의 체력도 바닥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