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8월 10일 18:39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 7월 23일 열린 부동산정책 국민 대토론회에서는 주택 공급과 금융, 세제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주택이 여전히 가장 안전한 투자처이자 노후를 대비하는 중요한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집이 순수한 '거주의 공간(Residence)'에서 '최고의 투자자산(Investment)'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강남 개발 본격화와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한 부동산 가격 급등기였다. 이후 몇 차례의 부동산 가격 상승기를 거치면서 '부동산 불패'에 대한 믿음은 더욱 공고해졌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배경이 있다. 국내 금융시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부동산이 물가상승률을 뛰어넘는 거의 유일한 자산증식 수단이었다. 이후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이 시장으로 흘러들면서 "지금 사지 않으면 영영 낙오한다"는 집값 상승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불안과 조급함도 커졌다. 여기에 일자리와 교육, 의료 등 주요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서울의 주택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전망'의 의미까지 갖게 됐다.
그 결과 우리나라 가계 자산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높다. 청·장년기 소득의 대부분을 주택 관련 대출 원리금 상환에 사용한다. 그만큼 자기 계발과 건강관리, 문화·여가,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뒤로 미루기도 한다. 결국 집은 소유하기 위해 현재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부분을 포기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집값은 올랐지만, 삶의 질은 오히려 낮아지는 '하우스푸어(House Poor)'의 역설이다. 소유에서 거주로, 주택의 선택지를 넓혀야최근 부동산 세제를 둘러싼 논의에서도 단순한 보유보다 실제 거주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려는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장기보유에 대한 혜택을 거주기간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논의가 대표적이다. 주택을 얼마나 오래 보유하는 것보다 실제 거주에 더 큰 가치를 두겠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제 개편만으로 수십 년간 굳어진 인식을 바꾸기는 어렵다. 결국 해답은 안정적인 거주를 보장하는 새로운 형태의 주택을 공급하는 동시에, 주택 소유에 의존하지 않고 자산을 형성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양질의 임대주택은 충분히 현실적인 대안이다. 다만 국민들이 이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도 분명하다. 임대 거주에 대한 사회적 인식, 짧은 계약기간에서 오는 불안정성, 잦은 이사 부담 때문이다. 여기에 낮은 수준의 마감재와 소형 평형 위주의 공급은 실거주 만족도를 떨어뜨렸고, 집값이 오를 때마다 자산 형성의 기회에서 소외된다는 박탈감도 컸다. 따라서 공급의 방향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단순히 임대주택의 수를 늘리는 것을 넘어 장기간 살고 싶은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
좋은 참고 사례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의 공공주택은 '99년 장기 임대형 분양(Leasehold)'을 기반으로 한다. 영구적인 토지 소유와는 다른 구조지만 장기간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어 사실상 자가에 가까운 주거 안정성을 제공한다.
우리도 중대형 평형과 우수한 생활 인프라를 갖춘 고품질 임대주택을 확대하고, 20~30년 이상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더 나아가 임대에 거주하면서도 단계적으로 지분을 취득해 자산을 형성할 수 있는 '사다리 구조'를 설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주거 안정과 자산 형성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주택상품과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를 함께 충족시킬 수 있다. 자산 형성의 경로를 다변화해 생산적 금융으로동시에 자가주택 보유만이 유일한 자산 형성 수단이라는 사회적 인식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주택 수요에는 안정적인 공간에서 거주하려는 목적과 함께 장기적으로 자산을 늘리고 싶은 목적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러한 자산 형성 욕구를 외면한 채 주택을 거주의 공간으로만 바라보자고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인 해법이 되기 어렵다.
주택에 쏠린 자본의 일부를 주식과 채권, ETF, 연금저축 등 다양한 금융자산으로 분산한다면 무리한 차입을 통해 집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자산 증식의 경로를 만들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자산 형성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주택 구입에 과도하게 묶여 있던 가계의 자금이 금융시장을 통해 기업과 성장산업으로 흘러간다면 기업의 성장과 혁신을 지원하고 경제 전체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정부가 강조하는 ‘생산적 금융’도 결국 자본이 보다 생산적인 영역으로 이동하도록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양질의 임대주택 공급은 단순한 주거복지 정책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주택 소유에 대한 과도한 부담에서 벗어나면 개인의 삶에도 변화가 생긴다. 대출 원리금과 이자 상환에 집중됐던 현금흐름의 일부를 자기 계발과 건강, 가족, 그리고 새로운 경험에 투자될 수 있다.
집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공간이다. 자산으로서의 가치 역시 중요하지만 그 가치가 개인의 삶 전체를 압도할 필요는 없다. 안정적인 거주와 다양한 자산 형성의 기회가 함께 제공된다면 주택 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보다 유연하고 안정적인 삶을 설계할 수 있다.
우리 사회도 집을 '어디에 얼마나 가졌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어떻게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주택의 소유 가치를 뛰어넘는 거주 가치와 삶의 가치까지 함께 바라보는 것, 그것이 앞으로 우리 주택시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