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들이 '전기차를 사지 않겠다'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충전인프라, 충전속도, 주행거리, 안정성 등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핵심 요인 중 하나는 역시나 가격입니다. '특별한 차이도 없는데 내연차 대비 비슷하거나 오히려 비싼 가격으로 굳이 전기차를 사야하냐'는 건 전기차를 사지않는 대부분의 소비자들의 생각입니다.
전기차사들이나 배터리사들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전기차 시장을 확대하려면 지금보다 가격을 낮출 필요가 있다는 점은 업계 관계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있습니다.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침체)에 빠진 업계가 최근 배터리 가격 낮추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배터리는 전기차 가격의 40%를 차지하는 핵심부품인만큼 배터리 가격을 낮추지 않는한 전기차 가격 인하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배터리를 좀 더 싸게 만들 수 있을까는 현재 전기차, 배터리 업계의 최대 고민입니다.
일론 머스크도 꿈꾸는 '건식공정'
배터리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소재를 싸게 생산하거나 공급받는 방법도 있지만, 현재 국내 회사들이 가지고 있는 벨류체인내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갑자기 소재를 싸게 들여올 수는 없는 법입니다. 대신 배터리사들은 공장내에서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비용을 낮추는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고민끝에 나온 것이 '건식 공정'입니다. 배터리 제조과정은 크게 리튬·코발트·알루미늄·흑연 등 광물 생산 과정, 양극재·음극재와 같은 소재 생산 과정, 소재들을 모아 배터리 셀을 제조하는 과정으로 나뉩니다. 비용이 가장 많이 투입되는 마지막 단계 배터리 셀 제조과정에서 공정혁신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재들을 모아 배터리셀을 만드는데는 보통 '습식공정'이라는걸 이용합니다. 습식공정은 문자에서 느껴지는 느낌 그대로 '습기가 있는 공정'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양극활물질(양극재), 음극활물질(음극재) 등을 섞어 액체상태인 '슬러리'라는 것으로 만든 뒤 금속판에 코팅하는 과정입니다. 습식공정은 크게 '믹싱-코팅-건조-압연' 총 네단계로 이뤄집니다.
우선 양극재를 액체인 슬러리로 만드는 믹싱 과정에서 특정한 용매가 필요한데 이 용매의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건조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배터리를 물기가 있는 상태에서 사용할 수는 없으니 높은 열로 물기가 없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가열해야 하는데, 여기에 쓰이는 에너지가 모두 비용이 되는 셈입니다. 건조하는 공간 역시 따로 마련해야 합니다.
건식공정은 활물질을 섞어 액체가 아닌 고체 파우더 형태로 제조하는 방식입니다. 고체 가루를 얇게 압축 배터리 금속판에 부착하는데, 총 공정 단계가 '믹싱-필름화(코팅+압연)' 두 단계로 줄어듭니다. 건조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데다, 공정이 줄어들어 배터리를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설비규모도 작아집니다.
업계는 설비투자 규모는 30%, 배터리 생산비용은 15~30%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테슬라 CEO인 일론 머스크는 "건식공정을 발전시켜 배터리 가격을 현재 대비 절반가까이 줄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배터리 가격을 절반으로 낮출 수 있다면 단순 계산을 해봐도 전기차 가격을 지금보다 20% 내릴 수 있습니다.
한 배터리사 임원은 “캐즘이 자연스레 넘어갈 것 같지는 않다"며 "빠르게 위기를 극복하려면 결국 가격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데 건식 공정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기술
이렇게 좋은 건식공정을 배터리사들은 왜 하지 않았을까요. 공장내에 건식공정 설비를 갖추는게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혁신의 아이콘인 테슬라가 건식 공정을 도입하겠다고 밝힌 지 벌써 4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건식공정의 핵심인 고체 파우더를 얇게 압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배터리사들이 좌절을 겪어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고체 파우더로 만들어 압연을 하는 과정에서 민감하고 예민한 양극재들이 가진 성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문제가 크다는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입니다. 성능이 제대로 나오려면 소재들이 골고루 퍼져야하는데 액체와 달리 고체는 소재를 골고루 섞는게 쉽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다른 색깔의 흙들을 물에 넣어 섞는 것과 가루 상태로 섞는 것의 차이와 유사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최근들어 기술적 장벽을 극복하고 있다는 신호가 관찰되고 있습니다. 국내 배터리 3사중 하나인 삼성SDI는 국내 회사중에서는 처음으로 충남 천안에 건식공정 시험 생산 시설을 완공하고 시범 생산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윤창 SDI연구소장(부사장)은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한국경제신문 주최 '코리아 인베스트먼트 위크(KIW) 2024'에서 “충남 천안에 건식공정 파일럿 라인을 이미 완공해 시험 생산 가동을 시작했다”며 "이름은 ‘드라이EV(DryEV)라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구체적인 양산 시점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2027년이면 본격적으로 건식공정으로 배터리를 만들기 시작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내 1위업체 LG에너지솔루션도 건식공정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연내에 시범생산설비를 시작해 2028년 건식공정을 통한 배터리 대량 양산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입니다. 김제영 LG에너지솔루션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지난 7월 미국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배터리 경쟁사 중 현재 건식 전극은 에너지솔루션이 최고로 10년 전에 시작했다”며 “올해 4분기 중 건식 전극 공정의 파일럿 생산라인을 완공하고 2028년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안을 밝히지 않은 SK온 역시 유사한 시점을 목표로 연구개발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국과의 경쟁에서 강력한 무기 될 것"
국내 배터리사들이 건식공정에 주목하고 있는건 시장 확대뿐 아니라 중국과의 경쟁에도 강력한 무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 배터리사들의 실적 부진은 캐즘으로인한 시장 침체뿐 아니라 중국의 위협도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국내 배터리 3사가 주력 생산하고 있는 NCM(니켈코발트망간), NCA(니켈코발트알루미늄) 삼원계 배터리가 '가성비' 중국산 LFP(리튬인산철) 배터리에 고전하면서 점유율을 점진적으로 잃고 있습니다. LFP배터리는 상대적으로 대략 20~30% 가격이 싼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건식공정 조기도입으로 NCM, NCA 배터리의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다면 LFP와도 가격면에서 해볼한 싸움이 될 것이란 관측입니다. 한 전기차 회사 관계자는 "중국은 저가 LFP를 장착한 1000~2000만원대 전기차로 해외로 진출하고 있는데, 공정 혁신에 성공해 에너지밀도와 가격을 갖춘 전기차가 나온다면 이를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