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업계가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새로운 분야에 기술력과 인력을 집중하고 있다. 반도체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술 주권’을 지키기 위해 이같은 경향이 나타났다는 분석이다.○EDA 없이 칩 개발 불가능
13일 업계에 따르면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해주는 전자설계자동화(EDA) 소프트웨어(SW)가 반도체 전쟁의 변수로 부상했다. EDA는 반도체 집적회로(IC) 디자인을 설계·검증할 때 필수로 사용하는 SW다.
건축 설계도를 그릴 때 컴퓨터지원설계(CAD)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 반도체는 공정마다 고비용이 투입되기 때문에 오차 없는 설계와 이를 시험하는 테스트가 중요하다. 결함을 칩 완성 후 알게 되면 전량 폐기해야 한다. EDA를 활용하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다. 제조 전 시뮬레이션으로 설계와 오류를 판단하고 문제를 검증하는 식이다.
이 시장은 소수 기업이 장악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EDA 점유율은 시놉시스 32%, 케이던스 30%, 지멘스EDA 13%다. 미국 3사가 세계 시장 75%를 차지한다. 한국에도 EDA 기업이 두어 곳 있지만 점유율은 ‘제로(0)’에 가깝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비롯해 전 세계 주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는 전부 3사의 SW를 사용한다.
최근엔 미국이 대 중국 반도체 규제를 강화하면서 EDA 중요성이 더 부각되고 있다. 중국 업체가 미국 EDA를 쓰는 것이 막히자 현지 반도체 생태계가 올스톱됐다. 국내 팹리스들은 미국의 대 중국 규제 이후 훌쩍 뛴 EDA 비용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SW 가격이 최대 수십억원이라 팹리스로선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EDA 구매 비용을 세액공제해준다는 방침을 정했다.○HBM 이어 CXL이 뜬다
메모리 분야에선 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가 반도체 전쟁의 새 전선으로 부상했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빅테크의 AI 인프라 구축을 위한 무기로 떠오르면서다. CXL은 AI 반도체에 들어가는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가속기, 프로세서 등 서로 다른 시스템을 연결하는 장치다. 생성형 AI가 대세가 되고 데이터 처리량이 급증하면서 CXL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기존 서버에서 사용하던 D램은 한정된 범위에서만 용량 확장이 가능해 대규모 용량 처리에 한계가 있다. 이런 용량 한계로 데이터 병목현상이 발생하자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처리 속도를 높인 HBM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SK하이닉스 등 국내 D램 업체들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배경이다.
병목현상을 해결하는 두 번째 방법은 장치 간 연결 경로를 간소화해 데이터 처리를 최적화하는 CXL이다. CXL D램을 사용할 경우 서버 한 대당 메모리 용량을 그렇지 않을 때보다 최대 10배가량 늘릴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HBM이 도로 위에 고가 도로를 설치하는 개념이라면 CXL은 2차선 도로를 8차선으로 넓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선 파네시아가 CXL 팹리스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업계에선 CXL 1.1 또는 2.0 솔루션을 사용 중이지만 이 업체는 CXL 3.0까지 공개했다. 파두의 자회사 이음과 오픈엣지테크놀로지, 메티스엑스도 활약 중이다. 시장조사업체 욜인텔리전스에 따르면 CXL 시장은 2022년 1700만달러에서 2028년 158억달러로 급격히 성장할 전망이다.
김용석 성균관대 반도체융합공학과 교수는 “데이터센터 시장 성장에 발맞춰 CXL 수요가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 EDA
‘Electronic Design Automation’의 약자로 반도체 설계에 필수인 소프트웨어(SW)를 말한다. 건축 설계도를 그릴 때 컴퓨터지원설계(CAD)를 쓰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최신 공정의 고성능 반도체는 EDA SW 도움 없이는 개발이 불가능하다.
▶ CXL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메모리 확장 장치, 가속기, 프로세서, 스위치 등 서로 다른 다양한 시스템을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통신 기술)를 의미한다. 데이터양이 급증하면서 메모리 용량이 커지자 이를 효율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등장한 기술이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