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기반인 에너지산업이 지나친 관치의 영향으로 붕괴 직전입니다. 한국전력이 혁신할 수 있도록 정부가 자율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 전기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구자윤 한양대 명예교수는 10일 “한국은 소위 ‘전·화·기’(전기 화학 기계) 산업으로 일어선 나라인데 지금은 전기 경쟁력이 유독 떨어진다”며 “전력산업의 주축이 돼야 할 한전이 관치 탓에 혁신은 뒤로 하고 관리 경영에만 몰두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구 교수는 한국전력 사외이사, 전기위원장 등을 지내는 등 수십 년간 전력산업 정책 결정의 중심에서 활동해 왔다. 해외에서도 에너지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 CIGRE가 주는 ‘명예상’을 받았다. CIGRE는 세계 전기기술 표준 제정에 참여하는 전력산업 분야 핵심 협의체다.
그는 다음달엔 CIGRE 최고 영예의 상인 ‘CIGRE 메달 어워드’를 받는다. 메달 어워드는 2년에 한 번 103개 회원국이 전기 분야에 수십 년간 헌신한 인물 중 두 명을 선정해 시상하는 것이다. 아시아인으로는 그가 유일하다.
구 교수는 한국 전기산업 경쟁력이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글로벌 전기산업 무대에서 후발주자이던 중국이 한국의 자리를 빼앗은 지 이미 오래됐고 몇몇 분야에선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며 “전력산업은 용인 반도체클러스터 등 다양한 산업의 기반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세계 경쟁력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국의 전력산업이 혁신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지나친 관치의 폐해를 꼽았다. 구 교수는 “한전과 같은 기술기업은 엔지니어가 중심이 돼 혁신을 이어나가야 하는데 관에서 비전문가가 내려오다 보니 기술 혁신엔 관심이 없다”며 “외국에서도 정부 입김이 없지는 않지만 한국처럼 지나치게 간섭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에너지 정책은 모든 산업의 기반을 마련하는 정책으로 50년 앞을 내다보고 제정해야 한다”며 “정권에 따라 에너지 정책이 바뀌는 것도 전력산업이 성장하지 못하는 배경”이라고 덧붙였다.
한전이 대규모 적자에 시달리는 것 역시 한국 전력산업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구 교수는 “두부 장사를 하는데 두부값을 안 받고 콩값을 받았으니 적자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며 “국내 전력산업의 주축이 돼야 할 한전이 투자 여력이 축소되니 전력업계의 미래도 어두워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전력산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정부는 한발 물러서고 산·학의 협력이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구 교수는 “기업은 자본을 대고 대학은 인력을 공급하되 정부는 지나친 간섭을 삼가야 한다”며 “산업화 시대에는 전력산업이 정부의 보조자 역할을 맡는 것으로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한전이 앞장서 기술 혁신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