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건설회사의 전쟁터로 불렸던 재건축·재개발 정비사업지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건설사가 수주 사업성 기준을 대폭 강화하면서 정비조합이 시공사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어서다. 업계에서는 시공사 품귀 현상이 벌어지면서 예정된 주택 공급이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높아진 공사비 부담 때문에 건설사의 선별 수주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실종된 건설사 ‘수주 경쟁’
18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올 1분기 10대 건설사의 정비사업 수주 총액은 4조5242억원이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 수주 총액(6조7036억원)과 비교하면 32.51% 감소한 수치다.
시공능력평가 1위 삼성물산은 지난 1분기 서울 송파구 가락상아2차 리모델링 사업 한 건(3753억원)만 수주했다. 작년 1분기 수주액(8172억원)보다 크게 줄었다. 현대건설도 올해 1분기 3건(8094억원)을 수주하는 데 그쳤다. 작년 같은 기간(1조6638억원)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10대 건설사 중 대우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 롯데건설, HDC현대산업개발은 지난 1분기 동안 도시정비사업을 한 건도 수주하지 않았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금융 비용 리스크와 공사비 상승, 기존 사업지와 조합 간 갈등 등이 겹쳐 ‘확실한 사업지만 수주하자’는 인식이 건설사 사이에서 강해졌다”며 “조합과 계약 조건이 조금만 틀어져도 아예 수주를 포기한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과거 건설사의 수주전에 웃던 정비사업 조합은 요즘 ‘건설사 모시기’조차 힘겨워하는 상황이다. 서울 중구 신당9구역은 시공사 선정을 위한 입찰이 연거푸 유찰됐다. 앞선 현장 설명회에 여러 건설사가 참여했는데, 정작 본입찰에는 한 곳도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등포구 남성아파트 재건축 조합은 여섯 번이나 입찰을 시행했지만, 시공사 선정에 실패했다. 일반분양 물량이 46가구에 그쳐 사업성이 낮다는 게 건설사가 외면한 이유다. 동대문구의 청량리8구역도 최근 롯데건설만 단독 참여해 두 번 유찰됐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가로주택정비사업이나 소규모 재건축은 사정이 더 심각하다. 강동구 암사동 495 가로주택정비사업과 강북구 미아3구역, 마포구의 공덕현대 재건축 등은 시공사가 참여하지 않으면서 사업이 지연될 가능성이 높다. ○사업성 따져가며 ‘옥석 가리기’건설사는 공사비 상승 및 조합과의 갈등 등으로 도시정비사업 수익성이 크게 악화했다는 반응이다. 특히 공사비 인상을 두고 기존 사업지에서 갈등 사례가 빈번해지자 사업성이 확실한 대규모 단지 중심으로 수주하는 ‘옥석 가리기’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 최근 재건축 사업을 수주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사업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종 안전장치를 계약서에 포함하려고 하는데, 조합 반발이 극심하다”며 “신규 사업에서 조건이 맞지 않으면 협상 없이 발을 빼자는 기류가 강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형 건설사 관계자도 “내부적으로 올해 단 한 곳만 수주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며 “경쟁은 물론이고 2000가구 이상 대단지가 아니면 검토조차 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건설사가 도시정비사업 참여를 꺼리면서 주택 공급 물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커졌다. 서울시에 따르면 올해 정비사업을 통한 입주 예상 물량은 1만9000가구다. 2024년엔 정비사업을 통해 2만3000가구가 공급될 예정이다. 지난 5년 평균(2만8000가구)을 밑도는 수치다. 그마저도 건설사가 수주 참여를 미루면 공급 물량은 더 줄어들 수 있다.
유오상 기자 osy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