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빌라. 벽면 타일 곳곳이 떨어지는 등 낡은 6층 원룸에서 세입자 최모씨(35)가 화장실 세면대를 뜯어내고 있었다. 벽과 계단을 타고 건물 전체로 번진 누수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다. 최씨는 배관공과 함께 전동드릴로 바닥을 뚫은 뒤 약 15m 떨어진 보일러실을 분주히 오갔다.
38가구가 살고 있는 이 빌라는 약 5년 전인 2018년 세입자 전체가 전세사기를 당했다. 건물주가 보증금을 챙겨 자취를 감추자 세입자들이 건물 관리에 나선 것이다. 6년 전 이 빌라에 입주한 최씨는 전세금 약 7000만원을 돌려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살게 됐다고 한다. 그는 “건물을 관리하려고 소방안전관리자 자격증까지 땄다”고 했다. 그는 이날 작업 감독을 위해 회사에 반차를 냈다.
전세사기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문제의 빌라에 ‘주저앉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보증금 반환 소송 등 사태가 장기화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관리 감독할 건물주마저 없어 슬럼화하는 빌라가 증가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관리인 부재…“불이라도 나면 어쩌나”
수도관이 터진 빌라 벽면 곳곳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다. 저층 복도와 계단은 벽면을 타고 내려온 물로 흥건했다. 누런 물때가 일부 벽면을 뒤덮었고 콘크리트로 추정되는 뽀얀 가루도 수북했다. 엘리베이터 운행도 중단된 상태. 세입자 김모씨(37)는 “승강기가 운행 중 멈추는 사고가 종종 있었다. 건물 전체가 엉망”이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6층 세입자 김모씨(87)는 2주가 넘도록 승강기를 이용할 수 없어 사실상 갇혀 지내는 형편이다. 평소 보행기를 끌고 10m밖에 안 되는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매일 약 30분씩 운동하는 것이 유일한 활동이다. 김씨의 요양보호사는 “할머니는 제대로 걷지 못한다”며 “건물에 불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최근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전세피해지원센터에서 만난 피해자 김모씨(33)는 “기약 없이 전세사기 빌라에서 살아야 할 처지”라며 “건물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전세사기 건물들 점검해야”서울 화곡동 피해 지역은 새로 지은 빌라가 대다수여서 건물 상태는 그나마 양호했다. 문제는 분쟁 해결이 장기화할 경우다. 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건물 관리가 커다란 짐이 된다. 서울시 관계자는 “현행법상 50가구 이상 오피스텔이나 아파트는 관리 책임의 정확한 규정이 있는 데 비해 적은 가구 수의 빌라는 이렇다 할 규정이 없다”며 “사실상 세입자들이 알아서 건물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전세사기 피해가 난 건물 중 대다수가 적은 인원이 사는 다세대·다가구 주택”이라며 “피해자들은 개별적으로 관리비를 부담하고 이후 손해배상과 같은 민사소송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김모씨(37)는 “피해자 대부분이 사회생활에 바쁜데 건물 관리까지 하도록 내모는 것은 잘못됐다”며 “정부가 만든 허술한 법 때문에 전세사기가 발생했으니 현실성을 감안해 구제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 구제책을 시행할 때 건물 관리 영역까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정부가 전세 사기와 연관된 건물에 대해 안전상 문제가 없는지 등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철오 기자 che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