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 기조연설은 약 6시간 전 엠바고(보도 유예)를 걸고 순방길에 동행한 출입 기자들에게 배포됐습니다. 미국보다 시차가 13시간 빠른 상황을 고려한 편의입니다. 그런데 두시간여를 앞두고 기조 연설 내용이 수정됐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윤 대통령이 연설 직전 정독을 하면서 추가한 내용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 하면서 다시 노트북을 열었는데 예상 외의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UN이 창립된 직후 세계 평화를 위한 첫 번째 의미있는 미션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UN군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것이었습니다. UN의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세계 시민의 자유 수호와 확대, 그리고 평화와 번영을 위해 UN과 함께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연설문 말미에 추가된 이 세 문장은 이날 기조 연설의 핵심 메시지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윤 대통령의 세계관과 이에 근거한 외교 철학을 이렇게 잘 보여주는 대목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 대통령의 외교철학을 관통하는 가장 큰 키워드는 한국전에 파병한 동맹국과 연대입니다.
윤 대통령이 한미와 한중 관계 중 한미 동맹을 우선하는 가장 큰 이유도 한국전 당시 파병을 결정한 동맹국이기 때문입니다. 윤 대통령이 당초 계획된 일정을 변경하고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에 참석한 배경도 한국전 당시 2위 파병 국가였다는 점이 고려됐다는 전언입니다.
윤 대통령은 고인의 장례식을 마치고 떠나는 날 페이스북에도 “여왕이 즉위했을 때 대한민국은 공산 세력의 침략으로 전쟁 중이었다”며 “지금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눈부신 번영은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대통령실의 한 핵심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해외 순방을 할 때 마다 한국전 파병 기념비를 찾고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만나려 한다”고 귀띔합니다.
이날 기조연설은 세계무대를 향한 윤 대통령의 첫 공식 기록물입니다. 마지막 세문장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통령실의 고위 관계자는 “늘 막판까지 홀로 (연설문을) 쓰고 지우고 한다”면서도 “글쎄요..”라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의 참모들도 그 의중을 알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약육강식의 정글과 다름없는 세계 무대에서 굳이 70년 전 전쟁 인연을 끌어들이냐는 반문을 할 수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한국전을 실제 경험한 이들은 극히 소수로 남아있습니다. 보다 인접한 중국과 경제적으로 얽힌 이해 관계자들이 더 많습니다. 노련한 정치인, 외교관이라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는 외교 노선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윤 대통령이 이런 정치인들과 분명하게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한미 동맹을 우선하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 노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를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이런 세계관은 한국의 외교정책 방향을 이끄는 가늠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조금 다행스러운 일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질서가 당분간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현실론입니다. 동맹 중심의 윤 대통령의 외교 철학이 중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자못 궁금해 집니다.
뉴욕= 좌동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