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올해 에너지기본계획을 다시 짜기로 한 건 윤석열 당선인의 ‘탈원전 폐기’ 공약 이행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문재인 정부가 졸속 추진한 탈원전 정책으로 후폭풍을 맞은 산업통상자원부도 인수위에 ‘질서 있는 원전 복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에너지기본계획이 재수립되면 단계적인 원전 축소와 대대적인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핵심으로 한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정책도 대수술이 불가피하다.기본계획 고쳐야 후속 절차 가능
2019년 6월 심의·확정된 3차 에너지기본계획에는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의 기본 방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 계획을 통해 신규 원전 건설과 노후 원전의 수명 연장 금지를 공식화했다.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을 금지하고, 노후 석탄발전소를 폐지하겠다는 내용도 3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확정됐다.
새 정부에서 에너지 정책을 이끌어야 할 산업부가 인수위 업무보고 때 에너지기본계획을 손봐야 한다고 보고한 배경이다. ‘탈원전’과 ‘신재생 확대’에 초점을 맞춘 3차 에너지기본계획을 유지한 상태로는 신한울 3·4호기 원전 건설 재개, 노후 원전 계속운전 등 윤 당선인의 핵심 공약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수위는 원전 복원과 에너지 안보 강화로 에너지 정책의 핵심을 정하면서 산업부 제안을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2024년으로 예정된 4차 에너지기본계획 수립 시기를 2년 앞당겨 올해 다시 짜면서 에너지 정책의 중심을 원전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또 이에 기반해 올 연말까지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새롭게 세운다. 전력수급계획은 2년 단위로 수립되며 올해 재수립이 예정돼 있다.신한울 3·4호기 건설 탄력받을 듯윤 당선인의 탈원전 백지화 의지가 확고한 만큼 문재인 정부 때 벼랑 끝에 몰렸던 원전산업은 부활을 눈앞에 두게 됐다. 윤 당선인은 대선 승리 후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조속히 재개하겠다”고 밝혔고, 고리 2호기를 비롯해 노후 원전의 계속운전도 허용하겠다고 공언해왔다.
문제는 속도다. 신한울 3·4호기는 2017년 발전 사업 허가까지만 받은 상태여서 관련 절차를 밟는 데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2016년 이뤄진 환경영향평가는 작년 8월 유효기한이 지났다. 산업부는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시점을 2025년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는 윤 당선인이 강조해온 ‘즉시 재개’와 거리가 있다.
인허가 절차를 단축·생략하는 방안도 있다. 하지만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에너지기본계획은 원칙적으로 5년마다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새 정부가 이를 앞당겨 수정할 경우 논란이 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인수위는 에너지기본계획 수정 없이 올해 말 예정된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곧바로 ‘원전 비중 확대’ 방안을 담는 방안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수립된 2차 에너지기본계획 수정 없이 8차 전력수급계획을 수정했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2019년 제주에 긴급히 착공한 남제주복합화력발전소도 (에너지기본계획 수정 없이 하위 계획인) 8차 전력수급계획에 포함이 안 된 발전소를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에너지 안보 부각인수위는 원전 복원과 함께 ‘에너지 안보’도 새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로 정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자원 무기화’에 나서는 주요국의 움직임 등을 감안할 때 에너지를 안보와 연계해 다뤄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동북아 그리드(전력망)’ 등 중국, 러시아 등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높이려는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전환 계획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위는 △에너지 수입처 다변화 △에너지 동맹 강화 △핵심 광물 확보 △수소 인프라 구축 △저탄소 에너지기술 개발 등도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정동욱 한국원자력학회장(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은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대표적인 방안 중 하나가 원전”이라며 “원전 복원과 에너지 안보 강화는 서로 연결된 주제”라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