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이름 없는 자동차 제조사를 ‘글로벌 톱5’로 끌어올린 현대자동차·기아의 내연기관 개발 조직이 사라진다. 대신 전기자동차 개발을 전담하는 조직이 새로 설립됐다. 전기차 시대가 눈앞에 온 시점에서 더 이상 새 가솔린 및 디젤 엔진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다. 전기차에는 엔진과 변속기 등 파워트레인이 들어가지 않는다. 엔진 개발 조직이 전기차 개발 조직으로
23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지난 17일 연구개발본부 조직개편을 했다. 핵심은 본부 내 파워트레인담당을 전동화개발담당으로 바꾸는 것이다. 담당은 부사장급 임원이 지휘하는 연구개발본부 내 가장 상위 조직이다.
파워트레인담당 소속 하부 조직도 대대적으로 바꿨다. 1983년 구성된 엔진개발실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엔진개발센터를 폐지했다. 엔진개발센터에 있던 엔진설계실 등은 전동화설계센터 소속으로 옮겼다.
이미 개발 완료한 엔진을 부분적으로 손질할 조직만 남겨놓되 이를 전기차 개발 조직 아래 둔 것이다. 기존에는 전기차 개발 조직이 파워트레인개발담당 산하에 있었다. 파워트레인시스템개발센터는 전동화시험센터로, 파워트레인성능개발센터는 전동화성능개발센터로 바뀐다. 담당 및 센터 단위 조직 중 파워트레인이란 이름을 쓰는 조직은 모두 없어졌다.
전동화개발담당 산하에 배터리개발센터를 새로 구축했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를 양산하지는 않더라도 기술 개발을 주도하겠다는 의미다. 배터리개발센터 내에는 배터리설계실과 배터리성능개발실, 배터리선행개발실 등이 자리 잡는다. 17일 인사를 통해 새 연구개발본부장에 임명된 박정국 사장은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우리의 독자 엔진 개발은 괄목할 만한 업적이지만 과거 큰 자산을 미래의 혁신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체계를 변경해야 한다”고 밝혔다. 내연기관차 시대 저문다현대차·기아의 연구개발본부 조직개편안이 공개되자 그룹 내에서도 ‘파격’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현대차·기아에 엔진 개발은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의 엔진 개발 역사는 1983년 시작됐다. 당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현대차 고위 임원들을 모아놓고 “차를 만든 지 20년이 다 돼 가는데 어떻게 우리 엔진이 없나. 독자 엔진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그해 9월 연구소 내 엔진개발실이 신설됐고, 극비리에 개발이 시작됐다. 현대차는 1991년 첫 독자 개발 엔진(알파엔진)을 내놓는 데 성공했고 이후 베타·세타·타우엔진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독자 개발 엔진은 현대차·기아가 급성장할 수 있도록 이끈 1등 공신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 내연기관 엔진 개발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판단에 현대차그룹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2025년이 되면 전기차 판매량이 2200만 대로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현대차도 2026년에 전기차 170만대를 판매한다는 목표다.
내연기관차가 도로에서 사라지는 시기가 빨라질 전망이다. 유럽연합은 2035년 내연기관차를 퇴출시키겠다고 선언했다. 폭스바겐과 메르세데스벤츠 등은 새 내연기관 엔진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기초소재 개발에도 힘준다현대차그룹은 연구개발본부 내 부서 간 칸막이를 허물기 위한 조직개편도 시행했다. 개별 신차 단위의 개발을 총괄하던 프로젝트매니지먼트(PM)담당과 현대차·기아가 생산하는 차량 전체에 적용하는 기술을 연구하던 제품통합개발담당이 통합된다.
현대차그룹은 또 연구개발본부의 센터 2~6개를 총괄하는 ‘담당’급 조직을 상당수 폐지했다. 연구개발본부장과 센터장이 직접 소통해 더욱 빠른 의사결정을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부서 간 칸막이를 없애겠다는 정의선 회장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정 회장은 2019년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타운홀 미팅에서 “사일로 문화(각 부서가 담을 쌓고 다른 부서와 소통하지 않는 문화)는 우리가 공무원보다 더 심하다는 평가가 있다”며 “다른 부서와 협업을 얼마나 잘하는지를 평가해 인사고과에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이 밖에 기초선행연구소는 기초소재연구센터로 이름을 바꿨다.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판매가 늘어날수록 배터리, 반도체 등의 원료가 되는 기초소재가 중요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도병욱/김일규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