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유학생으로 갔다가 첫 직장으로 일하게 된 대학교에서 종신교수가 됐다. 어렵게 종신교수가 되고 나니, 한국인 동료와 친지들은 한결같이 “종신교수 심사를 통과하여 부교수가 되셨다니,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한턱 크게 내셔야 하겠습니다!”라고 덕담을 건넸고, 외국인 동료들은 “수고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내가 식사 대접을 꼭 할게요!”라고 덕담을 건네 왔다. 어떻게 똑같은 일을 두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일까?
얼마 전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며 다시 이 상황을 떠올리게 됐다. 샌델 교수는 미국이 개인의 능력을 숭배하는 사회가 되다 보니, 능력주의의 폐해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서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게 된 사람들이 그러한 성과가 오롯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산물이라고 믿는 오만에 갇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믿게 됐다는 것이다.
반면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위치와 권한이 내 능력의 결과라기보다, 운이 좋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으로 생각해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해 동정과 연민의 감정으로 지원을 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샌델 교수는 결코 세습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능력주의가 몰고 온 미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파헤치면서 심지어 지금 용납할 수 없는 세습제마저도 가졌던 계층 간의 연민과 겸손함이 사라진 미국 사회를 꼬집고 있다.
어쩌면 그 당시 내가 종신교수가 된 것을 미국인들은 나의 개인적인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축하했던 것이 아닐까?
반면에 한국인 동료들은 나의 개인적인 능력도 있었지만 그러한 결과가 있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한 것이 아닐까? 내가 잘된 것에는 다른 사람의 희생이 있었을 수도 있고, 또 나와 비슷한 실력과 노력을 갖추었더라도 운이 없어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겸손해야 한다는 뜻일 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중요시하면서도, 그 밖의 요인도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잘된 사람도 결과에 대해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외곬으로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의 성공을 ‘운’과 ‘빽’에 따른 것으로 치부하게 되어 열심히 묵묵히 성실하게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있을까. 우리의 젊은 친구들이 ‘내 집 마련’은 요원할 것 같아 일확천금을 꿈꾼다면 정말 슬프고도 암울한 문제다. 기성세대가 겸허한 마음으로 다독이고 이해하면서 서로를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