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자체 개발한 화재감시 시스템을 납품하던 산업용 설비 제조업체 A사는 지난 5월 공공기관에 공급하려다 큰 벽에 부딪혔다. 국내 인증(KC)뿐 아니라 미국 인증(UL), 유럽 인증(CE), 중국 인증(CCC)의 엄격한 안전 기준을 충족했지만 소방안전인증을 또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품 검사에 시험수수료, 공장심사수수료 등 수백만원이 드는 데다 3~6개월이 더 소요되는 상황에서 A사는 납품을 포기했다.
중소기업이 중복·늑장 인증에 따른 부담과 과도한 인증 수수료를 감당하지 못해 납품과 신제품 개발을 포기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정부가 오래전부터 제도개선을 추진했지만 인증제도의 해묵은 폐해가 여전히 중소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토교통부 환경부 고용노동부 등 24개 부처는 80개 법정의무 인증과 106개 법정 임의인증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연간 인증 취득 비용은 평균 2180만원, 취득 소요 기간은 5.5개월에 이른다. 한 문구제조업체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인증료 때문에 국내 판매를 포기하고 수출에 전념하고 있다. 이 업체 사장은 “6000원짜리 문구류를 국내에서 인증받으려면 2000만원 이상 드는데, 까다로운 독일에선 3분의 1 비용으로 가능했다”며 “검사와 인증 항목도 독일보다 한국이 훨씬 많아 국내에선 도저히 장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소형 전자제품업체 사장은 “여름용 제품을 판매하려 했는데, 몇개월간 인증을 기다리다 출시 타이밍을 놓쳤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 유관 인증기관들은 수수료 장사로 배를 불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0일 구자근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한국건설생활환경연구원(KCL) 한국기계전기전자시험연구원(KTC)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KTR) 등 중소기업이 이용하는 대표적인 4개 시험인증기관의 최근 5년간(2016~2020년) 인증 수수료 수입은 2조1127억원으로 집계됐다.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에도 전년보다 9.3% 증가한 4890억원을 기록했다.
김문겸 숭실대 벤처중소기업학과 교수는 “정부가 인증기관의 배만 불리는 유사·중복 인증을 없애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크게 저하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자근 의원은 “중소 제조업의 취업자 수와 소득은 감소하고 공장 가동률 또한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 유관 인증기관의 수수료 수입이 천문학적으로 늘고 있다는 것은 큰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며 “비싼 인증 수수료를 대폭 인하하고 느리고 복잡한 제도 절차를 전면 수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