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신을 맞으려는 한국인들의 사투(死鬪)가 눈물겹다. 백신 접종 예약사이트가 개설될 때마다 신청이 폭주해 사이트가 마비되기 일쑤다. 어렵사리 접속에 성공해도 ‘100시간 넘게 대기하라’는 안내문에 분통이 터진다. 찌는 무더위 속에서 이런 씨름까지 해야 하니,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다. ‘백신 예약에 성공하는 비법’을 전수하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오고, 대입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능 모의평가에 백신 접종을 새치기하려는 가짜 수험생들이 몰리는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있을까.
이 모든 사달은 백신 공급 부족에서 비롯됐다. 한 번 이상 백신 주사를 맞은 사람이 1629만여 명(20일 0시 기준)으로 전 국민의 31.7%, 2차까지 접종을 완료한 사람은 661만여 명으로 12.9%다. 접종 완료 비율이 전 세계 평균(12.8%. 18일 기준, 옥스퍼드대 집계)에 겨우 턱걸이했고, 1차 접종률이 최소 50%를 넘어선 지 오래인 유럽과 북미 선진국에는 근처에도 못 간다.
백신을 넉넉하게 확보한 유럽과 북미에서는 “안 맞겠다”고 버티는 사람들에게 주사를 맞히는 일이 급선무다. 백신 접종자에게 복권을 나눠주고, 시원한 맥주나 도넛을 주거나, 심지어 마리화나를 경품으로 주기까지 한다. ‘당근’만으로 안 되자 ‘채찍’도 동원하고 있다. 프랑스가 백신 미접종자에게 식당·카페와 대중교통, 문화시설 등의 접근을 제한하기로 한 데 이어 그리스도 백신 접종자만 술집·영화관·공연장에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백신을 맞고 싶어도 물량이 없어 애를 태우는 한국인들에게는 아득한 별나라 얘기다.
영국이 19일부터 거리두기와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화 등 코로나에 관한 모든 규제를 전면 해제한 것은 높은 백신 접종률(한 번 이상 69%, 완료 53%) 덕분이다. 백신 접종의 효과와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최근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5만 명을 넘나들며 세계 1, 2위를 다투는 영국과 인도네시아의 사례가 보여준다. 두 나라는 델타바이러스 감염자가 신규 확진자의 99%라는 점은 같지만, 사망자가 하루 1000명을 넘는 인도네시아와 달리 영국은 20~40명선에 그치고 있는 점이 다르다. 결정적 차이는 백신 접종률이다. 인도네시아는 백신을 한 번 이상 맞은 사람이 15%, 접종 완료자는 6%에 못 미친다. 초(超)비상이 걸린 인도네시아는 필수업종 이외에는 100% 재택근무를 의무화하는 등 국민 발목을 꽁꽁 묶는 것으로 대처하고 있다.
코로나 방역에 성공적으로 대처해 왔음을 전 세계에 자랑해온 한국의 민낯이 겹쳐진다. 정부가 ‘K방역’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대응 방식의 핵심은 강력한 국민 통제다.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병·의원의 신속한 검진과 치료 시스템도 한몫했지만, 실내외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넘어 감염 차단을 위한 철저한 모임 통제가 ‘한국형 방역’의 핵심 메뉴다. 결혼식 등에서부터 교회 예배와 같은 종교 행사를 규제하는 것은 물론 음식점 노래방 등의 출입까지 아직껏 강력하게 제한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정부가 큰 치적으로 내세워온 K방역은 온갖 불편과 불이익을 참고 견딘 국민들의 참여와 순응, 희생의 반사체다.
최근 코로나 4차 대확산이 일어나자 정부가 내놓은 대책 역시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전보다 더 세게, 더 철저하게’ 강도(强度)를 끌어올렸다. 사람들의 발목을 꽁꽁 묶은 ‘K방역 완결판’을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국민이 많다. 자영업자들이 대표적이다. 음식점·PC방·카페 등 22개 업종 자영업자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차량 시위를 벌이는 등 조직적으로 반발하고 있지만, “제발 살려 달라”는 절규일 뿐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소규모 자영업자들에게 ‘저녁 6시 이후 3인 이상 금지’는 폐업 명령에 가깝다.
그런 이들의 비명과 하소연을 정부는 ‘불법 집회 봉쇄’로 대응하고 있다. 엊그제 코로나 임시선별검사소를 찾아 “의료진이 땀범벅이 된 모습을 보면 정말로 안쓰럽고 가슴이 아프다”며 격려한 문재인 대통령이 자영업소를 방문할 수는 없는가. 백신을 제때 확보하지 못해 온 국민이 생고생하고 있지만, 생존의 갈림길에서 발버둥치는 자영업자들의 상황은 특히 심각하다. 몇 푼의 보상금으로 넘길 게 아니라, 그들에게 다가가 귀 기울이고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