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고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역사가 쓰인 이래 늘 그래왔다. 고달픈 현실에 절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삶이 과학기술의 발달과 사회 제도의 변화에 발맞춰 개선돼 온 것도 분명하다.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발전의 최전선에 선 선진국 국민이라면 그 혜택을 크게 봤을 터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의 첨병이라는 미국에서 삶이 질이 악화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면 이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는 현대 미국 사회의 병폐에 대한 예리한 진단서이자 신랄한 고발서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같은 대학에서 건강·보건 분야 전문가로 명성을 쌓은 앤 케이스 명예교수가 함께 썼다. 디턴 교수는 인류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역정을 찬양했던 전작 《위대한 탈출》과 달리, 이번 책에선 여전히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절망, 예상과 달리 다시 증가하는 죽음으로 눈을 돌린다.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자본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는지, 어떤 폐해를 양산하고 있는지 비판의 눈초리를 치켜뜬다. 책이 묘사하는 세계는 급격한 자살 증가와 사망률 상승, 마약과 실업의 확산, 소득 격차의 확대, 부실한 의료 서비스 등 잿빛 일색이다. 마치 현대 자본주의가 낳은 것이 번영이 아니라 절망과 좌절인 것처럼 다가온다. “자본주의의 미래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돼야 한다”는 저자들의 선언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현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음을 감지하는 키워드는 ‘죽음’이다. 미국 사회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1999년부터 2017년 사이에 60만 명이 ‘추가적’으로 사망했다. 선진국들이 그려오던 사망률 감소 궤도에서 미국이 이탈하면서 발생한 ‘죽지 않았어도 될’ 사람들의 수다. 2017년엔 그 수가 15만8000명에 달했다. 교통사고(4만100명) 피해자 수를 훌쩍 뛰어넘는다.
양적으로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나빠졌다. 자살과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에 따른 ‘절망사(deaths of despair)’가 급증한 것이다. 공장이 문을 닫고, 가게들이 영업을 중단한 탓에 절망감과 박탈감, 소외감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마약에 빠지거나, 총을 쏘거나 목을 맸다는 얘기다.
절망사는 평등하지 않게 다가왔다. 특히 중년 백인의 사망률 증가가 도드라졌다. 1990년 10만 명당 30명이던 45~54세 백인 남녀의 절망사 비율은 2017년 92명으로 뛰었다. 죽음은 주로 배우지 못한 이들을 덮쳤다. 웨스트버지니아, 켄터키, 아칸소, 미시시피 등 전국 평균보다 학력 수준이 낮은 주들에서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치솟았다.
대학에 다니지 못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기회가 줄면서 2017년 고졸자 실업률은 대졸자의 두 배에 달했다. 숙련도가 떨어지는 이들은 경기가 회복돼도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다. 소득 격차도 커지면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다. 결혼의 기회는 박탈됐고, 그들을 보듬어줄 종교와 사회 커뮤니티는 사라졌다. 그렇게 상처는 아물지 않고 방치됐다.
자연스럽게 미국 사회 전반으로 질병은 만연하고, 치료의 길은 멀어졌다. 기대수명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저이고, 1억 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최소 3개월 이상 지속되는 만성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반면 ‘모순의 백화점’ 격인 미국의 의료보험제도는 의료비가 세계에서 가장 높지만,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사회를 구축했다.
미국 사회를 이 같은 절망의 나락에서 끌어낼 방법은 무엇일까. 아쉽게도 예리한 칼날이 드러낸 환부의 참상과 달리 이를 봉합할 해법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제약업계의 무분별한 행동을 막는 약물 처방 기준 강화, 직업 안정성을 높이는 노동 시스템의 개편, 세금과 복지제도의 수선 같은 즉자적인 해법들이 미지근하게 언급될 뿐이다.
저자들은 보편적 기본소득과 부유세의 도입에도 찬성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최저임금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소폭’으로 인상돼야 한다고 못박는다.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반(反)시장적 조치가 아닌, 좌우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개혁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보완해야 한다고 주문할 뿐이다. “자본주의를 신뢰한다”는 원론적 기대가 과연 미래의 자본주의를 구원할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지만….
한편, 퇴고를 충분히 거치지 않은 번역은 아쉬움을 남긴다. ‘곡물법(Corn Laws)’을 ‘옥수수법’으로 엉뚱하게 풀이한다든지, ‘자기 집을 사고’라고 하면 될 것을 ‘자가를 사고’ 식으로 어색하게 옮긴 탓에 원저의 가치를 음미하는 게 자주 방해를 받는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