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벌써 50조…기업들, 코로나發 격변에 '재빠른 사냥꾼' 변신

입력 2021-06-27 17:33
수정 2021-06-28 10:51
“‘IB(투자은행)맨’으로 23년 일하면서 이런 ‘큰 장’은 처음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M&A(인수합병)가 이뤄졌고 딜의 패러다임도 확 바뀌었다.”(글로벌 IB 아시아지역 대표)

지난 1년여간 기업들은 M&A 시장에서 전례없이 숨 가쁘게 움직였다. 국내에선 거의 매주 대규모 인수전이 진행됐고,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힌 상황에서도 역대 최대 수준의 해외 기업사냥이 이뤄졌다. 신사업·핵심 사업에서 압도적 선두에 오를 기회를 포착한 기업은 조(兆)단위 거래도 단숨에 단행했다. 한쪽에선 수십 년간 영위했던 사업을 미련 없이 접었다. 플랫폼 기업들은 올해 유난히 두각을 나타냈다. 네이버·카카오는 의사결정 속도와 유연성을 바탕으로 기업들을 사냥하며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했다. 올 들어 M&A 시장이 보인 특징이다.

체급 대신 속도…유연해진 기업들기업들은 일제히 자산 경량화에 나섰다. LG는 지난해 중국 베이징의 핵심자산인 베이징 트윈타워를 팔았고, LG화학의 편광판 사업도 정리했다. 올초엔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대신 글로벌 업체 마그나와 합작사를 설립(LG전자)해 차량전장 사업으로 무게추를 옮기는 새판 짜기에 들어갔다.

SK는 모태인 ‘통신과 정유’도 내려놓는 변화를 단행했다. SK루브리컨츠에 이어 SK종합화학의 지분까지 매각하며 자산 효율화에 나섰다. SK텔레콤은 더 이상 통신기업으로 남지 않겠다며 회사를 통신회사와 투자회사로 쪼갰다. 박정호 사장을 포함한 핵심 사단은 통신회사 대신 투자회사로 자리를 옮겨 M&A 성과로 시장에서 평가받겠다고 선언했다.

‘쿠팡 충격’에 휩싸인 오프라인 유통기업들도 핵심 자산을 내놓으며 M&A에 사활을 걸었다. 롯데그룹은 이베이코리아 인수전을 앞두고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까지 금융회사에 담보로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CJ그룹은 강점이 있는 물류(CJ대한통운)와 미디어(CJ ENM)에 역량을 집중하고, 플랫폼은 외부의 힘을 빌리기로 결단해 네이버와 지분 교환을 단행했다. 더 세진 K파워국내 대표 기업들은 주력 분야에선 글로벌 1위가 되기 위해 수조원의 현금도 아끼지 않고 투입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말 10조원 규모 인텔 낸드 사업부를 인수해 컨트롤러 기술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2011년 현대건설 인수 이후 M&A 시장에서 존재감을 찾기 어려웠던 현대자동차그룹도 2019년 글로벌 자율주행사 앱티브와 합작사를 설립했다. 지난해엔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해 시장을 놀라게 했다.

올해엔 ‘라이징 스타’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는 세계적 레이블인 이타카홀딩스를, 신생 사모펀드(PEF)인 센트로이드는 세계 3대 골프 브랜드인 테일러메이드를 품었다.

해외 빅딜은 하반기에도 쏟아질 전망이다. 현금 100조원을 보유한 삼성전자는 곧 유의미한 M&A를 보이겠다고 주주들에게 알렸다. LG그룹 역시 쌓아둔 실탄을 바탕으로 해외 M&A 시장 진출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LG그룹의 딜을 차지하기 위해 IB맨들이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를 찾고 있다. 곳곳에서 플랫폼 혈투M&A 시장에서 카카오와 네이버 간 공방은 치열하다. 올초 네이버가 글로벌 1위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를 인수하자, 카카오는 곧바로 미국 웹툰·웹소설 플랫폼 래디시·타파스를 동시에 품으며 맞불을 놨다. 웹소설 플랫폼 문피아와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권을 놓고도 두 회사가 경쟁을 펼쳤다.

플랫폼 전쟁은 곳곳에서 벌어졌다. 신세계가 의류 플랫폼 W컨셉을 인수하자 무신사도 경쟁사인 스타일쉐어와 29CM를 사들였다. 카카오는 지그재그를 인수하며 한발 더 나아갔다. ‘유니콘’에 몰린 뭉칫돈수천억원 규모 현금은 이제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들의 투자유치 거래에선 흔히 찾아볼 수 있게 됐다. 2016년 3곳에 불과하던 유니콘 기업은 이제 13곳 이상으로 늘어났다. 마켓컬리는 최근 2000억원대 투자를 유치하면서 기업가치를 2조원대로 평가받았다. 야놀자, 토스, 무신사 등도 투자 유치에 나섰다. 야놀자는 몸값 10조원, 토스는 8조원, 무신사는 2조5000억원에 이른다. 당근마켓을 비롯해 의류 플랫폼 에이블리, 독서 플랫폼 리디북스 등 수천억원 몸값을 인정받은 예비 유니콘 기업 앞에도 투자자가 줄을 서 있다. ‘멀티플’ 대신 스토리그동안 기업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은 ‘한 해 버는 현금 몇 년을 모아야 인수 비용을 되찾을까’였다. 전통 제조업은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 대비 10배, 음식료(F&B)업은 11배를 적용하는 식이다. 이 같은 ‘적정 가격’은 이제 낡은 이론이 됐다. 당장 내년 산업 판도가 어떻게 변할지 가늠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매년 유입될 현금을 가정하는 게 가능하냐는 질문에 직면했다.

이베이코리아, 하이퍼커넥트, 야놀자, 이타카홀딩스, 지그재그 등 대부분 적자거나 한 해 많아야 수백억원 남짓의 이익을 거두는 회사들이 1조원 넘는 몸값을 인정받았다. ‘계산기’를 대체하는 ‘스토리’를 만드는 게 M&A 시장에서의 성패를 결정짓게 됐다.

차준호/김종우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