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놀림은 무뎠다. 박자를 놓치기도 했고, 음이 뭉개지기도 했다. 연주하는 도중 숨을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들려준 음악은 진솔했다. 겉치장 없이 담백한 선율이 객석에 스며들었다. 지난 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지휘 거장 정명훈의 피아노 독주회 이야기다.
40년 넘게 무대에 섰던 그도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손을 연신 풀었고 허리를 두드리기도 했다. 앞선 공연에서의 실수가 부담을 준 탓일까. 지난 23일 대구 독주회에서였다. 정명훈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0번' 중 2악장 연주에 접어들자 길을 잃었다. 박자를 놓쳤고 일부 마디를 건너뛰기도 했다. 해프닝은 아니었다. 지난 27일 수원 공연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대구 공연을 감상한 황장원 음악평론가는 "대가의 연주인생에서 특별히 기억할 페이지였던 공연이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씁쓸했다"고 평가했다.
이날 공연에서도 실수는 되풀이됐다.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60번' 연주를 마친 후였다. 그는 손을 어루만졌다. 불안감 속에서 다시 이어진 연주. 2악장에 접어들자 균형감을 잃었다. 마지막 악장을 연주하기 전에 그는 객석을 향해 "손이 참…. 나중에 말씀드릴게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1부가 혼란 속에서 마무리됐다.
나성인 음악평론가는 1부 연주를 두고 "연주 자체에 몰입하지 못한 것 같다"며 "호흡도 일정하지 못했고, 박자나 선율의 응집력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중간휴식이 끝난 후 그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안정적으로 건반을 짚었고 음색은 짙어졌다. 브람스의 '세 개의 간주곡'을 마무리한 후 객석에서 벨소리가 들려도 여유있게 대처했다. 미소를 지으며 벨소리와 같은 멜로디를 피아노로 들려줬다. 객석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마지막 곡인 브람스의 '네 개의 피아노 소품'을 마무리하자 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안정감을 되찾자 그의 진가가 드러났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듯 어우러지는 저음과 고음, 끝없이 변주하는 박자. 지휘자로서 들려줬던 입체적인 음악을 피아노 한 대로 표현해냈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후반부 연주에 대해 "2부 연주는 특별했다. 톤과 리듬이 매순간 변화하면서 정명훈이 아니라 브람스가 드러나는 연주였다"고 평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이 깎일 수 도 있던 공연이었다. 담담한 선택이었다. 연주가 자신의 기대치에 맞지 않았다면 공연을 모두 취소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무대에 올랐고 자신의 음악을 피아노로 선보였다.
이미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기도 했다. 지난 22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명훈은 "손놀림이 젊을 때와 다르다. 관객들에게 용서부터 구할 것 같다"며 미리 양해를 구했다. 그는 "'세상에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이 많은데 왜 내가 해야 하나'라고 자문했는데,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 했다"며 "음악은 가장 진솔한 언어"라고 덧붙였다.
그의 깊은 음색은 앙코르에서도 이어졌다. 정명훈은 앙코르로 슈만의 '아라베스크'와 '트로이메라이',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를 들려줬다. 이번에도 문제가 생겼다. 정명훈이 아니라 관객들이 저지른 실수다.
트로이메라이 선율이 흐르던 중 객석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수없이 반복됐다. 다른 관객들은 '관크'(공연장에서 다른 관객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를 당한 것이다. 끌어올랐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식었다. 여러 모로 아쉬움이 남았던 무대였다. 정명훈은 오는 3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전국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오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