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IT 인사이드] 韓 게임, 돈만 좇다 잃어버린 것들

입력 2021-03-22 17:51
수정 2021-03-23 00:38

1990년대 후반 한국의 게임 시장은 혼돈 그 자체였다. 당시 주류였던 PC 패키지 게임은 불법 복제로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불법 게임을 공유하는 ‘와레즈(warez)’ 웹사이트가 범람했다. 게임 개발사 손노리가 2001년 내놓은 공포 게임 ‘화이트데이’는 초도 물량인 8000장도 다 팔지 못했지만 게임 버그를 고치기 위한 패치 파일을 받아간 숫자는 출시 이후 1개월 동안 15만 건이 넘었다. 불법 복제로 인한 매출 감소는 게임 퀄리티 저하로 이어졌다. ‘창세기전’ 시리즈로 국내 최고의 개발사로 손꼽혔던 소프트맥스가 2001년 선보인 ‘마그나카르타’는 출시 당시 버그 때문에 진행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게임 잡지들은 출시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게임을 부록으로 끼워 팔았다. 확률형 아이템으로 성장한 한국 게임 PC 패키지 게임 시장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본 개발자들은 온라인 게임으로 눈을 돌렸다. 1996년 넥슨의 ‘바람의 나라’가, 1998년 엔씨소프트의 ‘리니지’가 잇달아 나왔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과 PC방 확산으로 온라인 게임이 시장의 주류로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필수적인 온라인 게임 특성상 불법 복제가 불가능했다. 패키지 게임처럼 한 번 팔면 끝이 아니라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었다. 바람의 나라의 경우 초창기 월 요금이 4만9500원에 달했다.

이 모델은 안정적으로 매출이 나오지만 초기 진입 장벽이 높다는 단점도 있다. 한국 게임사들은 획기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한계를 해결했다. 지금은 전 세계 게임 회사의 표준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잡은 부분 유료화다. 게임은 무료로 할 수 있지만 게임 내 아이템이나 캐릭터를 갖기 위해 돈을 내야 하는 구조다. 넥슨이 1999년 출시한 온라인 퀴즈게임 ‘퀴즈퀴즈’에서 아바타를 꾸미기 위한 아이템을 유료로 판매한 것을 시초로 꼽는다. 게임 비용 부담이 줄어들자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 심리를 자극하면서 아이템에 돈을 쓰는 사람이 증가했다.

게임업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확률형 아이템 도입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맞았다. 원하는 아이템을 바로 사는 게 아니라 랜덤박스를 구매하면 여기서 일정 확률로 특정 아이템이 나오는 식이다. 캐릭터나 무기 등급을 SSR, SR, R 등으로 구분하는 게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 SSR 아이템이 나올 확률은 대개 2~3% 수준이다. 여기서 원하는 아이템이 나올 확률까지 따지면 소수점으로 내려가야 한다. 아이템 성능을 높이는 것은 물론 게임에서 직업을 고르는 것에도 확률이 적용된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돈을 얼마나 쏟아부어야 할지는 알 수 없다. 규모 걸맞은 문화적 영향력 기대우리나라 게임이 언제부터인가 ‘파친코’, ‘슬롯머신’이란 비아냥을 듣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 국내 게임회사들이 확률을 조작해 특정 아이템을 얻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용자들의 분노가 거세졌다.

게임은 기술과 콘텐츠가 접목된 종합예술이다. 영화나 소설과 달리 가상 공간에서 이용자가 직접 캐릭터를 움직이고 내용을 전개하며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산업을 넘어 시류를 이끄는 잠재력을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잘 만든 게임은 그 나라를 상징하는 문화가 되기도 한다. 슈퍼마리오와 포켓몬은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잡았다. 동명의 소설을 게임으로 만든 CDPR의 ‘더 위처’ 시리즈는 폴란드를 글로벌 게임 강국으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락스타게임즈의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는 게이머를 순식간에 미국 서부 개척 시대로 데려다준다. 매년 새해가 되면 일출을 보기 위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서부 몰락지대로 게이머들이 몰려든다.

한국 게임이 비즈니스 모델을 뛰어넘어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영향력을 갖길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일까. 매년 수많은 기관과 게임잡지, 웹진 등에서 ‘올해의 게임(GOTY·Game Of The Year)’을 뽑는다. 한 해 15조5750억원. 미국, 중국, 일본, 영국에 이어 게임 시장 규모 세계 5위(2019년 매출 기준)인 한국이 지금까지 한 번도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점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때다.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