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항상 진보하는가? 도시문제 전문가인 조엘 코트킨 미국 채프먼대 교수는 《신(新)봉건시대가 온다(the Coming of Neo-feudalism: a Warning to the Global Middle Class)》에서 1970년대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서 자유시장 경제와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이룩한 성과만 보면 분명히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선진국에 고착되기 시작한 신종 신분사회로 눈길을 돌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로마가 멸망한 뒤 몰락한 자영농민이 자유를 박탈당한 농노(農奴)로 전락하고, 소수 귀족과 사제 계층이 기독교적 사상 통제를 자행하며 특권을 누린 기나긴 암흑의 시절이 온 것처럼 역사는 분명 후퇴한 적이 있다. 근대 자본주의가 도래한 이후 새로운 도시 빈민인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20세기 생산성 혁명을 통해 이들이 중산층으로 대거 전환되는 장면에서 역사는 역시 진보한다고 고개를 끄덕일 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지금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신종 하층민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다. 그들은 서구 중세 사회에서 ‘제3신분(the Third Estate)’으로 분류됐던 평민과 농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법률상으로는 자유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지만 사실상 신분 상승 가능성을 차단당한 계층이다. 중세에 제1신분인 귀족과 제2신분인 사제의 자리에는 지금 누가 들어서 있는가? 부모 세대의 부와 권력을 이어받은 상류층과 여기에 봉사하는 고연봉 CEO, 고위공무원, 변호사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신종 전문직 엘리트들이다.
사람들은 믿는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도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번듯한 직장을 얻어 돈을 벌고 멋진 지역에 안락한 내 집 한 채 마련해서 살 수 있다고. 전에는 분명히 그랬었다. 18세기 유럽인들이 귀족이 지배하던 구체제의 수렁에서 벗어나 신대륙에 건설한 미국이란 나라는 바로 그런 꿈을 실현시켜주는 곳이었다. 미국의 성공한 부호, 지식인,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이처럼 교육받은 평민들의 능력으로 일군 성공이었지만 이제는 그들이 단합해서 부와 권력을 세습하고 자신들을 위한 규제를 만들며, 거기에 들지 못한 계층은 이민자와 본토 백인을 막론하고 빈곤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명문대를 나왔다고 해도 자신의 힘만으로 결혼해서 직장을 갖고 빚 없이 내 집 한 칸 마련해 버젓한 삶을 살 희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좌우 이념 문제도 아니다. 소련은 노멘클라투라 계층의 특권사회로 전락한 채 패망했다. 급성장 가도를 달려온 중국조차 공산당원과 이에 협조하는 상류층에만 부와 권력이 집중된, 불평등과 대중에 대한 통제가 극에 달한 후진 사회로 남아 있다.
놀랍게도 좌파는 자신의 오랜 혈맹이었던 노동자를 버렸다. 대신에 신기술 기업가, 사회의 지배엘리트, 성공한 유명인들과 결탁해 오히려 중산층의 몰락과 하층민의 누증을 가속시키는 주범이 됐다. 저자는 중세 성직자와 귀족에 해당하는, 21세기 신종 지배계급이 그토록 강조하는 인공지능과 트랜스휴머니즘, 데이터 사회, 바이오엔지니어링, 그린뉴딜, 기후온난화 극복 같은 멋진 이상들이 마치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했던, 지배층이 과학기술을 통해 우매한 하층민들을 교묘하게 지배하는 수단이라고 해석한다.
수많은 평민이 보조금과 임시노동만으로 삶을 이어가는 사실상 노예 상태로 전락해가는 상황에서 그들의 저항만으로 이를 막을 수 있을까? 정치인들은 겉으로는 좌든 우든 이념이라는 양두(羊頭)를 걸어놓고 뒤에서는 상류층과 결탁한 채 자신의 특권이라는 구육(狗肉)만을 챙기는 행태를 당장 중단하고, 신종 농노로 전락할 위기 속에서 절망에 빠진 계층들이 거대한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계층 이동성을 회복하는 데 모든 노력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저자는 질문한다. 기본소득이나 생활지원금 같은 얄팍한 수단으로 이게 과연 해결될 문제인가?
송경모 <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