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시장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제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기업 경영의 새로운 규칙으로 삼아 미래 성장 스토리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사진)은 지난 10월 말 제주에서 열린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그룹 계열사 CEO들에게 이같이 강조했다. 글로벌 산업 트렌드가 친환경으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는 만큼, ESG를 단순히 ‘착한 일 하자’는 구호로 여길 게 아니라 절박감을 갖고 구체적인 사업 비전을 내놔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SK그룹의 지주사인 SK(주)가 먼저 움직였다. 계열사들과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수소 사업에 본격 진출해 ESG 경영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SK이노 등과 사업추진단 신설SK(주)는 최근 에너지 관련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 SK E&S 등의 전문 인력 20여 명으로 구성된 ‘수소 사업 추진단’을 신설했다고 1일 밝혔다. 이 추진단은 수소 생산부터 유통까지 풀체인을 구축해 수소 사업을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키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SK(주)는 올초부터 수소 사업 추진을 위한 타당성을 검토하고 전략을 수립해왔다.
SK(주)는 우선 자회사인 SK E&S를 중심으로 연 3만t 규모의 액화 수소생산설비를 건설해 2023년부터 수도권 지역에 공급한다. 이를 위해 SK이노베이션으로부터 부생수소(석유·화학 생산시설에서 부가적으로 생산되는 수소)를 공급받기로 했다. SK(주)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 산하 SK인천석유화학이 수도권에 가까이 있어 장거리 운송에 따른 비용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SK E&S를 통해 친환경 ‘블루수소(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저장한 수소)’의 대량 생산 체제도 가동한다. 연 300만t 이상의 액화천연가스(LNG)를 직수입하는 SK E&S가 대량 확보한 천연가스를 활용해 2025년부터 25만t 규모의 블루수소를 추가 생산할 예정이다.
SK(주)는 장기적으로는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활용한 그린수소 생산 사업도 추진해 이산화탄소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수소 공급 체계를 완성하겠다는 전략이다. 2025년 28만t 친환경 수소 생산수소 생태계 구축도 SK(주)가 주목하고 있는 사업 분야다. 국내 수소 생태계 구축 사업은 아직 초기 단계다. 특히 운송·충전 인프라 부족으로 차량 보급이 더디고, 기존 수소 사업자들은 수요 부족을 이유로 생산설비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SK(주)는 석유 LNG 등 기존 에너지 사업 부문에서 생산과 유통, 공급에 이르는 밸류체인(가치사슬) 통합으로 생태계 조성을 주도한 경험이 있다. 이 같은 노하우를 기반으로 국내 수소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조속히 정착시키겠다는 것이다. 2025년까지 총 28만t 규모의 생산 능력을 갖추고, SK에너지의 주유소와 화물 운송 트럭 휴게소 등을 그린에너지 서비스 허브로 활용해 차량용으로 공급할 예정이다. 수소연료전지 발전소 등 발전용 수요 개척에도 나서기로 했다.
글로벌 수소 시장 공략을 위한 핵심 기술도 확보할 예정이다. SK(주)는 수소 관련 원천 기술을 보유한 해외 기업에 적극 투자하는 한편 글로벌 파트너십 체결 등을 통해 수소 사업 경쟁력을 조기에 확보할 계획이다. 이를 기반으로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시장에 진출할 방침이다. SK(주)는 이를 통해 2025년까지 그룹 차원에서 30조원 수준의 순자산가치(NAV)를 추가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SK그룹은 최근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RE100’(2050년까지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쓴다는 기업들의 약속)을 공식 선포하는 등 ESG 경영을 통한 사업의 딥 체인지(근본적 혁신)와 탄소 배출 감소 등에 힘을 쏟고 있다. SK(주) 관계자는 “이번 결정은 SK(주)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친환경으로 본격 전환하는 출발점”이라며 “국내는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도 ESG 경영을 선도하는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