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이야기] (4) 국민연금 CIO 정말 '자본시장의 대통령'일까

입력 2020-10-13 10:03
≪이 기사는 10월12일(06:00)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800조원에 육박하는 국민연금기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의 행보는 국내외 금융시장의 관심사다. 일명 '자본시장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CIO의 생각이 국민연금의 기금운용 방향성을 좌우한다는 기대가 시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동안 시장의 이목이 국민연금에 쏠렸다. 안효준 CIO의 2년 임기가 지난 7일로 끝나는 데도 정부나 국민연금공단 어디서도 그의 연임 여부에 대한 확답을 이달 초만 해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기금운용본부 직원들의 대마초 흡연 사건으로 시장에선 한 때 그가 연임에 실패할 것이라는 설(說)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고심 끝에 정부는 임기 종료 전날인 6일 안 CIO의 연임 결정을 내렸고, 설은 '썰'로 끝났다. 그리고 이 날 연임 결정에 내심 차기 국민연금 CIO 자리를 노렸던 이들은 아쉬워했고,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국민연금 CIO가 어떤 자리길래 이토록 많은 관심이 쏠리는 것일까.


◆ 777조 기금에서 나오는 힘...기업에도 금융권에도 '갑'

국민연금공단의 4명의 상임이사 가운데 하나인 기금이사인 CIO는 국민연금기금 적립금의 운용을 담당하는 기금운용본부의 장(長)이다. 국민연금기금의 관리와 운용 업무를 총괄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공식적 임무다.

먼저 CIO의 힘은 그가 책임지는 기금의 규모에서 나온다. 올해 7월 말 기준 국민연금기금 규모는 776조 6000억원에 달한다. 규모 기준으로 일본, 노르웨이 연기금에 이어 세계 3대 연기금으로 전 세계 연기금 가운데서도 '큰 손'으로 꼽힌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국민연금은 금융시장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한다. 워낙 거대한 기금을 자체 인력만으로 운용하기 어렵다보니 절반 가량은 민간 자산운용사들에 위탁한다. 올해 상반기 말 기준 국민연금은 전세계 313개 운용사에 자금을 맡기고 있다.

블랙스톤, 블랙록, KKR, 칼라일, 아카디안 등 내로라 하는 운용사들이 국민연금으로 부터 자금을 위탁 받아 운용한다.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는 조단위 초대형 투자건 상당수에 국민연금은 투자자로 이름을 올린다.


국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 측면에선 해외 어떤 연기금보다도 강력하다. 자국 투자 비중이 비교적 작은 해외 연기금과 달리 전체 기금의 65% 가량을 국내 시장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주식 시장에만 140조원 가량을 투자하는 국민연금은 전체 시가총액의 7% 가량을 홀로 책임진다. 삼성, 현대차, LG, SK등 국내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지분 10% 이상 상장사만 100여곳, 5% 이상 지분을 가진 곳이 300여곳에 달한다.

높은 지분율과, 다른 국내외 기관투자가 및 개인 투자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 국민연금은 매년 3월 기업들의 정기주주총회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캐스팅보터'로 떠오른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기업엔 대주주의 지위로, 금융권에는 운용사의 생명과도 같은 자금줄을 쥔 출자자로 모두에게 '갑'으로 군림하는 것이 국민연금"이라며 "이런 조직을 이끄는 것이 CIO"라고 말했다.

◆ 길어야 3년인 임기, 겹겹이 쌓인 견제장치...큰 흐름 바꿀 힘은 없어

물론 거대 연기금인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에서 CIO의 권한은 시스템적으로 제한된다. 국민연금공단의 상위부처인 보건복지부의 장관과 공단 이사장 등 직속 상관들 뿐 아니라 국민연금 가입자를 대표로 하는 기금운용위원회 등 여러 층의 견제 장치가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이 어느 한 사람이나 세력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와 전문위원회(전문위), 기금운용본부로 구성되는 기금운용체제를 이해해야 한다. 기금운용본부는 그 자체론 굵직한 기금운용 관련 정책이나 방향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연도별 운용계획이나 5년 단위의 중장기 자산배분계획, 조직개편 등 굵직한 정책은 전문가 중심으로 이뤄진 3개의 전문위(투자정책, 수탁자책임, 위험관리·성과보상)를 거쳐 국민연금을 납부하는 주체인 사용자, 근로자, 기타가입자 대표와 정부 인사 등 총 20명으로 구성된 기금위에서 결정된다. 기금위에 안건이 보고되기 전 최종 검토 및 자문 역할을 맡는 실무평가위원회까지 포함하면 기금운용본부가 만든 안건은 3단계를 거쳐 최종 결정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업계선 "CIO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 견해도 나온다. 철저히 실무 조직에 머무르는 기금운용본부의 역할과, 길어야 3년인 CIO의 임기를 감안하면 CIO가 국민연금의 중장기 계획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분석이다.

국민연금 출신의 한 업계 관계자는 "CIO에 취임한 순간 자신의 임기 중 자산배분 계획 등은 이미 거의 짜여져 있다"며 "CIO의 역할은 정해진 길을 사고 없이만 가게 돕는 관리자 역할에 머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민감한 주주권 행사 사안의 경우 의결권 행사 방향이나 주주권 행사 여부는 전적으로 상위 위원회에서 결정된다"며 "기획재정부나 감사원, 국회 눈에 튀지 않기 위해 일을 벌리기보단 사고 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자리"라고 덧붙였다.

◆ 대세는 못 바꿔도 月단위 투자 비중 결정...위탁운용사 선정도 좌우

대세를 바꿀 힘은 없지만 시장에 대한 영향력은 그것과 별개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그 해의 자산배분 같은 큰 차원의 운용 전략에는 영향을 못 미쳐도 그 해 정해진 투자금을 언제 어떤 곳에 분배할지와 같은 월 단위 기금운용이나 투자전략 선택 권한은 실질적으로 CIO에게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는 얘기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올해처럼 갑작스러운 코로나 사태로 시장의 변동성이 커졌을 때 국민연금과 같은 연기금이 언제 어떤 분야에 자금을 집행할 것인지가 시장의 최대 관심사가 된다"며 "긴 호흡의 방향 만큼이나 당장 자금이 어떻게 들어오는지가 시장에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해진 자산군 내에서 투자 전략을 채택하고, 거기에 맡는 위탁운용사에 자금을 배정하는 것 역시 CIO의 핵심 권한이다. 국민연금은 같은 자산이라도 다양한 전략으로 구분해 위탁운용사를 선정해 돈을 맡긴다. 주식을 예로 들면 국민연금은 △순수주식형 △중소형주형 △사회책임투자형 △액티브퀀트형 △장기투자형 △대형주형 △배당주형 △밸류형 등으로 투자 전략 및 유형을 나눠 위탁운용사를 선정한다.

기금운용본부는 투자 전략 채택, 위탁운용사 선정, 굵직한 투자 결정 등을 위해 투자위원회, 대체투자위원회, 리스크관리위원회, 투자관리위원회 등을 연다. 이사장이 위원장을 맡는 리스크관리위원회를 제외한 나머지 위원회는 CIO가 총괄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기존 펀드를 청산하고 다른 전략의 펀드로 자금을 갈아탈 때마다 관련 종목의 주가가 요동친다"며 "국민연금 CIO가 자본시장의 대통령인 이유"라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