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바람습작 - 천양희(1942~)

입력 2020-10-11 17:25
수정 2020-10-12 01:22
나무 동네 지나다 바람이 묻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
물구나무서기지 뭐…
가던 바람이 뒤돌아본다
물구나무도 있니?
나무라면 모두 흔들어보고 싶은
바람이 본색을 들어낸다
이 나무 저 나무
바람은 재미로 건들대지만
나무는 잎을 모두 떨어뜨린다

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나머지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저 나무들에게 들으시기 바란다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 中

기다리지 않아도 바람이 먼저 찾아오는 계절이에요. 문득 바람이 찾아다니는 것은 무엇일까, 지나가거나 소멸되는 것이 전부인 바람의 일을 생각해봅니다. 뒤돌아보는 바람이 없었다면 나무는 잎을 흔들지 않았을 테고 잎이 떨어지는 일도 없었겠죠. 바닥에 잎이 다 떨어졌으니 나무가 물구나무 선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거예요. 가을은 계절 중에 제일 짧지만 가장 눈에 띄게 변하지요. 남은 가을엔 작은 변화를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요? 바람에 물구나무를 서는 나무처럼요.

이서하 시인(2016 한경 신춘문예 당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