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바이오 대박 뒤엔…"30년 보고 투자하라" 故최종현 있었다

입력 2020-08-25 16:39
수정 2020-08-26 01:17

SK바이오팜은 지난달 초 ‘상장 잭팟’을 터뜨렸다. 지난해 미국 식품의약국(FDA) 신약 승인을 받은 뇌전증 치료제 엑스코프리의 잠재력에 투자자들이 열광했고, 주가는 상장 사흘 만에 공모가(4만9000원)의 네 배가 됐다.

SK바이오사이언스도 화제를 모았다. 빌 게이츠 빌&멀린다게이츠재단 회장이 지난달 “민간 분야 코로나 백신 개발에서 한국이 선두에 섰다”며 이 회사를 콕 집어 언급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내년 상용화를 목표로 단백질 재조합 백신을 개발 중이다. 아스트라제네카, 노바백스 등 글로벌 제약사들도 백신 제조를 의뢰하고 있다.

SK의 바이오 성과는 이 뿐만이 아니다. 원료의약품 수탁생산기업(CMO) SK팜테코는 지난 5월 미국 내 필수의약품 공급 업체로 선정됐다. 재계에서는 물론 의약업계에서도 SK의 바이오 성과에 놀라워 한다. 하지만 이는 갑자기 낸 성과가 아니다. 30년을 보고 투자한 결과물이다. 그 ‘주춧돌’은 최태원 SK회장의 부친인 고(故) 최종현 선대 회장이 놓았다는 것이 SK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전경련 회장으로 ‘소신발언’ 쏟아내 26일 타계 22주기를 맞은 최종현 회장은 1980년대 중반 바이오 사업 진출을 결심했다. “향후 그룹을 먹여 살릴 사업”이라고 여겼다. 1987년 옛 선경합섬 안에 생명과학연구실을 설립했고, 1990년 미국 뉴저지에 의약개발전문연구소도 세웠다. 당시 연구소를 세우며 최 회장이 한 말이 있다. “20년, 30년을 내다보고 투자하라”였다. 연구 실무자가 “10년을 보고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한 답이었다. 최태원 회장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바이오산업에서 결국 꽃을 피워냈다.

최종현 회장은 바이오 사업 투자에서 보듯 한번 뜻을 세우면 뚝심있게 끌고 나갔다.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 대학원을 나온 그는 전문가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1993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뒤에도 정책당국자에게 소신을 거침없이 말하곤 했다.

1995년 2월 연 기자회견은 그 단면을 보여준다. 당시 정부는 콜금리(은행 간 금리)를 연 20% 이상 높게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이 은행 돈을 끌어다 쓰기 힘들었다. 최종현 회장은 “콜금리가 연 25%인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경쟁국들은 연 3~4% 금리에 돈을 쓰는데, 세계화를 하자면서 금리를 이렇게 높게 유지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호흡기 달고 회의…IMF 총재도 만나최종현 회장을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책임감’이다. 재계 리더로 어떻게 해서든 역할을 다하려고 애썼다. 1997년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 기아, 한라 등 30대 그룹 중 7곳이 연이어 부도를 맞자 최 회장은 그해 9월 전경련 회장단 회의를 주재했다. 3개월 전 폐암으로 폐 절개 수술을 받은 그는 코에 산소호흡기 줄을 달고 회의에 참석했다. ‘국가부도’란 절체절명의 순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폐암 말기 상황에서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찾아가 대응방안을 논의했고,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방한했을 때 만나 한국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임종 직전까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최종현 회장은 사람을 무척 중시했다. 21세기 ‘1등 국가’를 꿈꿨던 그는 1974년 사재를 출연, 우수인재의 해외유학을 위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세웠다. 지원 조건도 박사과정 등록금 전액과 생활비까지 제공하는 등 파격적이었다. 5년간 약 3만달러로, 국민소득이 500달러에 불과했던 당시로선 거액이었다.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지금까지 3800여 명에 이른다.

최종현 회장이 재단을 세울 때 반대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SK는 50대 기업에 간신히 포함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사람들은 “굳이 그 많은 돈을 왜 학생들에게 주느냐”고 했다. 그는 이때 이스라엘 사례를 들었다. 이스라엘이 작지만 강한 국가가 된 것은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유학하고 자국으로 돌아간 유학생 때문이란 설명이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