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다'던 AMD의 깜짝반전 [조수영의 테크IT수다]

입력 2020-08-12 08:32
수정 2020-08-12 09:23

2등의 반란이 현실이 될까요.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을 사실상 독점해왔던 인텔의 독주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때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회사'로 여겨지던 AMD가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탈환하고 있습니다. 가성비와 기술 혁신이 무기입니다.

11일 시장조사 전문기관 머큐리 리서치에 따르면 AMD는 올 2분기 x86 CPU 시장에서 총 18.3%의 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지난 1분기보다 3.5%p,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는 1.2%p 오른 수치입니다. 부문별로는 x86 데스크톱 프로세서 시장에서 19.2%, 노트북용 x86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에서 19.9%를 기록하며 20% 돌파를 눈앞에 뒀습니다.

◆한때 CPU 양대산맥..연이은 실패에 '주가 1달러' 굴욕시장점유율 20%. 다른 업계에서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숫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CPU 시장의 역사를 몇년만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AMD가 지금 눈앞에 두고 있는 20%의 벽은 견고하고도 높았습니다. AMD로서는 2020년, 절대 허물어질 것 같지 않았던 벽을 넘어서는 순간을 맞고 있는 셈입니다.

AMD는 반도체 회사 페어차일드 출신인 제리 센더스가 1969년 설립했습니다. 인텔이 그보다 1년 앞선 1968년 페어차일드 창립자인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에 앤디그로브가 합류해 만든 회사라는 점에서 두 회사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AMD는 1999년 애슬론 시리즈로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가성비가 좋은데다 최초로 1Ghz의 벽을 뛰어넘은 제품이었죠. 2003년 최초의 X86기반 64비트 서버용 프로세서 '옵테론'과 데스크탑용 '애슬론64'를 출시했고 2005년에는 최초의 서버용 듀얼 코어 프로세서를 선보였습니다. AMD는 2006년 시장점유율을 49%까지 높이며 인텔과 CPU 시장을 양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AMD는 최대위기를 맞습니다. 인텔이 압도적인 성능으로 무장한 '코어' 시리즈를 내놓았지만 AMD는 제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2011년 후속 신제품을 내놓지만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시장은 인텔의 독주로 재편됐고 2006년 40달러를 웃돌던 AMD의 주가는 2012년 1달러대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무디스 등 시장평가기관에서 'caa1'(투자부적격) 등급을 내렸지요. 업계에서는 AMD에 대해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평가가 비등했습니다. 인텔의 독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난파선' 뛰어든 천재 엔지니어주가가 바닥을 기며 파산 위기에 몰린 AMD가 꺼내든 카드는 리사 수 박사(사진)였습니다. 대만계 이민자, 여성 공학자. 당시 실리콘밸리에서 보기 드문 소수자였습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26세의 나이에 IBM의 이사를 맡을 정도로 뛰어난 엔지니어였지만 2012년 AMD가 그의 영입을 발표하자 실리콘밸리에서는 '리사 후?(Lisa Who? 리사가 누군데??)' 라는 비아냥이 나왔지요.

2012년 부사장으로 취임한 수 박사는 PC에 국한돼 있던 시장을 콘솔게임으로 확대했습니다. CPU, GPU가 결합된 APU를 플레이스테이션4, 엑스박스 원 등의 콘솔기기에 탑재했습니다. 이전까지 AMD의 천덕꾸러기였던 APU는 비디오게임기에서는 최적의 칩이 되었고 2013년 5분기만에 적자를 탈출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014년 AMD는 수 박사를 최고경영책임자(CEO)로 임명합니다. 직원들에게 그녀가 당부한 말은 간결했습니다. "훌륭한 제품을 만들자." 이를 위해 수 박사는 '선택과 집중'에 나섰습니다. 흑자전환의 효자였던 APU를 정리하고 CPU 아키텍처를 고도화하는데 연구개발(R&D)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수 박사 자신도 직접 개발에 참여하며 내놓은 제품이 젠 아키텍처 기반 CPU '라이젠(RYZEN)'입니다. 2017년 인텔의 비슷한 사양 제품 절반 가격으로 나온 라이젠에 시장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젠 아키텍처 기반의 클라우드, 슈퍼컴퓨팅용 서버 '에픽(EPYC)'은 바이두, 마이크로소프트 등 주요 클라우드에 채택되며 시장을 확보했습니다. ◆가성비 앞세우고 7nm 선점기술 고도화에도 드라이브를 걸었습니다. 지난해 7나노미터(nm·10억분의 1미터)공정 제품을 내놓은데 이어 지금은 5nm 개발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달 인텔이 2분기 실적과 함께 7nm 공정 반도체 출시가 6개월 더 늦어질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AMD의 기술은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습니다.



실적은 고공행진 중입니다. AMD는 올 2분기 매출액이 1년 전보다 26% 늘어난 19억3000만달러(2조3200억원)라고 밝혔습니다. 18억달러선으로 내다봤던 시장예상치를 웃돈 결과입니다. 시장점유율까지 20% 턱밑까지 치고올라오면서 시장은 AMD의 추격전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같은 기적을 이뤄낸 그녀를 미국 언론과 반도체 업계는 '리사 수 CEO'가 아니라 '닥터 리사 수(리사 수 박사)'라 부릅니다. 반도체 산업에서 그가 만들어낸 업적과 전문성에 대한 존경의 표현입니다.

올 하반기에도 AMD의 공격적인 행보는 계속될 전망입니다. 수 박사는 지난달 29일 2분기 실적발표에서 새 CPU, GPU 및 서버용 프로세서 칩을 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하반기에도 리사 수의 매직이 이뤄질 수 있을지, 인텔은 어떤 대응에 나설지 업계가 주시하고 있습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