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근무했던 한국 외교관의 성추행 의혹 사건과 관련해 뉴질랜드의 외교적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총리, 외교부 장관 등 고위급 인사가 잇달아 공개적으로 한국 정부에 실망감을 드러내면서 해당 혐의자의 뉴질랜드 송환을 촉구하고 나섰다.
1일(현지시간) 윈스턴 피터스 뉴질랜드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은 뉴질랜드 스리텔레비전 뉴스허브 프로그램에 출연해 “혐의를 받고 있는 범죄는 한국에서 일어난 범죄가 아니라 뉴질랜드에서 일어난 범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는 그에게 외교관 면책특권을 포기하게 하고 우리나라(뉴질랜드)로 그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했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지난달 28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이 사안을 언급한 데 이어 부총리까지 공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방송에서 피터스 부총리는 “이 문제는 이제 최고위급까지 올라가 문재인 대통령도 알고 있는 사안”이라며 “(뉴질랜드 정부로선) 기다리는 것 외에 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며 한국 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우회적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외교관 면책특권이라는 걸 갖고 있고 그것이 세계 어디에서나 보호막이 될 수 있지만 이런 사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뉴질랜드 언론과 외교부에 따르면 한국 외교관 A씨는 2017년 말 주뉴질랜드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세 차례에 걸쳐 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외교부는 2018년 감사에서 이를 발견했고, A씨는 성추행 의도가 없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외교부는 A씨에게 감봉 1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뉴질랜드에서 정해진 임기를 마친 A씨는 그해 주필리핀 대사관에 전보돼 총영사로 근무 중이다.
A씨의 사건이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는 것은 A씨가 이미 필리핀으로 떠난 지난해 비로소 뉴질랜드 경찰이 관련 수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뉴질랜드 법원은 A씨의 체포영장도 발부했다. 그러나 A씨는 신체 접촉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성추행 의도는 전혀 없었다며 뉴질랜드에서 조사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뉴질랜드 당국은 한국 대사관에 현장검증과 폐쇄회로TV(CCTV) 영상 제출, 직원 인터뷰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외교부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외교사절을 주재국 경찰이 조사하는 경우가 드문 데다, 외교관 면책특권에 따라 주재국 사법 절차상의 면제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뉴질랜드 경찰을 대신해 대사관 직원들의 답변을 받아 보내주겠다고 역제안했으나 뉴질랜드 측은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락근 기자 rkl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