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5만원권 실종 사건

입력 2020-06-17 18:07
수정 2020-06-18 00:25
며칠 전 한 쓰레기 매립지의 침대 매트리스 속에서 5만원권이 쏟아졌다. 모두 180장에 900만원이었다. 돈다발 띠지를 단서로 주인을 찾았더니 치매 초기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며 돈 숨긴 걸 잊고 그냥 버린 것이었다. 가난한 시절 장판 밑이나 장롱 속에 돈을 묻어뒀던 기억이 새롭다.

고액권의 ‘저장 수요’는 시절이 안 좋을수록 늘어난다. 최근 빚어진 5만원권 지폐 품귀현상도 마찬가지다. 경기 침체에 코로나19 여파까지 겹쳐 중소기업·자영업자들의 ‘비상용 현금’ 수요가 급격히 늘었다. 일부 은행의 현금자동입출금기에선 5만원권 인출이 중단될 정도다. 농번기 일당을 지급해야 하는 농촌에서는 5만원권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한국은행으로 되돌아오는 5만원권도 지난달 2590억원으로, 3월(8554억원)의 30%에 그쳤다. 한은 관계자는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면 현금 확보 수요가 늘어나는데, 코로나 사태로 상거래가 위축돼 현금을 은행에 맡기는 자영업자 수는 줄었다”고 설명했다.

금리가 낮아진 것도 한몫했다. 기준금리가 역대 최저 수준인 연 0.5%로 떨어지자 예·적금이 줄어들었다. 그만큼 ‘장롱 화폐’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비대면 금융거래로 고액권 사용 필요성이 줄어든 데다 소비심리까지 얼어붙었다.

5만원권이 지하경제로 흘러들어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끊이지 않는다. 대형 비리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5만원권 가방’이나 쇼핑백이 등장한다. 최근 ‘라임 사태’의 몸통이 숨어 지내던 빌라에서 발견된 현금 5억여원과 여행용 가방 3개에서 나온 55억원도 5만원권이었다.

돈은 밝은 곳에서 제대로 돌아야 돈값을 한다. 5만원권의 ‘돈맥경화’ 현상은 나라 경제와 가계 살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한국조폐공사에서 신권 발행 설비를 밤낮으로 돌리고 있어 곧 수급 불균형이 해소될 거라고 하지만, 하반기는 돼야 공급이 원활해질 전망이다.

이 와중에 가슴 뭉클한 사연도 있다. 경남 통영의 한 마을에서 누군가 빨간색 차만 보면 5만원권을 꽂아놓고 갔다. 알고 봤더니 86세 치매 노모가 아들이 타고 왔던 빨간 차를 떠올리며 쌈짓돈을 끼워둔 것이었다. 노모는 “공부 못 시킨 게 너무 미안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럴 때 5만원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눈물겨운 ‘장롱 지폐’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