檢, 심의위 절차 무시한 '李 영장청구'…법조계 "나쁜 선례 남겼다"

입력 2020-06-04 17:34
수정 2020-06-05 00:47
검찰수사심의위원회(심의위)는 ‘검찰권 남용’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하던 2018년 검찰이 ‘셀프개혁’ 차원에서 도입한 제도다. 수사 계속 여부, 기소 여부 등의 적합성을 검찰이 아니라 법조계·학계·언론계 등 외부 전문가로부터 판단받아 수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검찰이 기소독점권을 일정 부분 내려놓는 측면이 있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심의위가 탄생한 지 2년여 만에 이 제도가 유명무실해지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심의위 소집을 요청한 지 이틀 만에 검찰이 이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해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피의자가 수사 자체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외부인의 의견을 구했는데, 검찰이 이를 듣기도 전에 인권침해적 요소가 강한 ‘구속’ 시도라는 선수를 친 것은 심의위 제도 취지를 명백히 벗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허 찔린 검찰의 반격

4일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은 당초 이 부회장이 심의위 소집을 요청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이 지난 2일 ‘심의위’ 카드를 꺼내자 법조계에선 검찰이 허를 찔렸다는 반응이 나왔다. 외부인들로 구성된 심의위가 1년8개월째 수사 중인 검찰보다는 덜 강경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만약 심의위가 이 부회장에 대해 ‘불기소 적정’ 의견을 낸다면 수사팀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관계자는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수사팀 일정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이 부회장이 심의위를 소집하기 이전에 이미 구속영장 청구 방침을 결정하고,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승인을 건의했다는 것이다. 윤 총장은 지난 3일 이를 최종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은 윤 총장과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의 주례 보고 자리가 있었다.

윤 총장은 과거 국정농단 특별검사팀에서 수사팀장을 맡으며 2017년 이 부회장을 구속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수사팀장 격인 이복현 부장검사와 윤 총장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사이”라며 “검찰 내에서도 삼성 사건을 둘러싸고 강경론과 신중론이 있었는데, 윤 총장이 이 부장검사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검찰 “구속영장 청구 절차 문제 없다”

하지만 검찰의 이 같은 결정이 심의위 절차를 무시하는 꼴이 됐다는 지적도 많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최대한 당사자의 불만이 없도록 공정하고 투명한 수사를 하겠다는 의도에서 심의위가 마련된 것”이라며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일수록 신중히 판단하라는 것이 제도 취지인데 검찰이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 측 변호인단도 “길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심의위 절차를 통해 사건관계인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원들의 충분한 검토를 받았다면 국민들도 검찰의 결정을 더욱 신뢰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변호인단은 또 “이 부회장은 경영위기 상황에서도 검찰의 수사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성실하게 수사에 협조해왔다”며 “이 부회장 등 세 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에 강한 유감”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검찰은 이번 구속영장 청구에 절차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심의위 관련 규정을 보면 사건관계인이 소집을 요청한 경우 구속영장 청구 여부 등은 심의 대상에서 빠져 있다”며 기소가 아닌 신병확보 관련 사안에 대해선 검찰이 ‘재량권’을 갖는다는 취지로 답했다.

또 “구속이 예상되는 피의자가 지연전략 차원에서 심의위 소집을 요청하면 그때마다 검찰이 신병확보 시도를 늦춰야 하느냐”며 “구속영장 청구와 별개로 이 부회장이 요청한 심의위 절차는 정상적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삼성 “범죄 혐의 수긍할 수 없어”

이 부회장은 현재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및 시세조종과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부감사법) 위반 혐의를 받는다. 제일모직의 대주주였던 이 부회장이 그룹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제일모직에 유리한 합병 비율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회계처리 기준을 바꿔 4조5000억원대 장부상 이익을 올린 것도 모회사인 제일모직의 가치를 부풀리기 위한 ‘고의적 분식회계’라고 봤다.

삼성 측은 이날 “검찰이 구성하고 있는 범죄 혐의를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고 했다. 합병 당시 제일모직 주가가 높았던 이유는 자회사 삼성바이오의 ‘미래가치’가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삼성바이오는 현재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3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검찰은 합병으로 삼성물산 주주들이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지만, 삼성 측은 오히려 이들이 합병을 통해 2배 넘는 이익을 봤다는 논리로 반박한다.

오는 8일 열릴 예정인 이 부회장의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선 검찰과 변호인 측이 치열한 법리싸움을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인혁/안효주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