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코로나 사망자' 英의 비극…변명 일관하는 정부

입력 2020-05-06 06:28
수정 2020-08-04 00:02
5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도심에 있는 대표적 관광명소인 트라팔가 광장. 내셔널갤러리를 비롯해 인근에 소호 거리와 레스터스퀘어, 세인트제임스공원 등 주요 명소가 밀집해 있어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곳이다. 하지만 이날 광장에는 무료급식을 챙기러 나온 노숙자들의 모습만 눈에 띄었다. 빨간 2층 버스인 더블데커는 승객 한 명도 태우지 않은 채 인근 도로를 주행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봉쇄조치가 발령된 지 이날로 43일째를 맞는다. 영국 정부는 지난 3월23일 필수 목적을 제외한 외출금지와 상점폐쇄 등을 담은 봉쇄조치를 발령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이 봉쇄조치를 일부 해제한 것과 달리 영국은 아직 별다른 완화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보건당국은 영국의 코로나19 사망자가 2만9427명으로 집계됐다고 이날 발표했다. 전날과 비교해 693명 늘어났다. 이날 이탈리아의 코로나19 사망자는 전날 대비 41명 늘어난 2만9315명으로 집계됐다. 영국 사망자 수가 이탈리아를 추월한 건 코로나19 사태가 본격 확산된 이후 처음이다. 이로써 영국은 유럽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국가가 됐다. 전 세계에선 미국에 이어 두 번째다.

정부의 안이한 초기방역과 정치인들의 상황 오판, 부실한 공공의료시스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럼에도 영국 정부는 사망자 수치를 과소집계하는 등 정부 실패를 감추기에 급급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코로나19 사태를 확산시킨 데 대한 최소한의 유감표시도 내놓지 않고 있다.

도미닉 라브 외무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영국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엄청난 비극”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사태가 끝날 때까지 국제적인 비교는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망원인에 대한 포괄적인 국제자료를 얻을 때까지 어느 국가가 잘 대응했는지 진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영국 정부는 코로나19 사망자 수치에 대한 유럽 각국의 기준이 다르다고 항변하고 있다. 우선 영국은 병원 사망자와 요양원 등 지역사회 사망자를 구분해서 발표한다. 영국 보건당국이 매일 발표하는 수치는 병원 사망자 기준이다. 다만 영국 통계청은 지난달 28일부터 요양원 등 지역사회 사망자를 포함한 수치를 공개하고 있다. 통계청 기준 영국의 코로나19 사망자는 이날 기준 3만2313명으로, 보건당국이 매일 발표하는 공식 사망자 대비 3000명가량 많다.

반면 이탈리아 정부는 사망자 통계를 낼 때 병원 중심으로 집계한다. 요양원 사망자는 상당수 빠져있다. 스페인은 요양원 사망자를 통계에 포함할 지 여부를 지방정부의 선택에 맡기고 있다. 코로나19로 사망했을 것으로 의심되지만 검사를 받지 않으면 사망자 통계에 넣지 않는다. 프랑스는 병원과 요양원 사망자를 모두 합쳐 발표하지만 자택 사망자 등 지역사회 사망자는 포함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일간 가디언은 “유럽 각국 정부의 통계기준이 다른 것은 맞지만 영국의 사망자 수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사망자 수가 연일 감소하고 있는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영국에선 신규 사망자가 지금도 매일 수백명씩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디언은 “국제 전문가들은 이미 한 달 전에 영국이 유럽에서 코로나19로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예측을 내놨다”며 “이를 전혀 믿지 않았던 영국 정부 관계자들은 사망자 수치를 과소평가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미국 워싱턴대 보건계량분석평가연구소는 올여름까지 유럽에서 15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으로 지난달 초 예상했다. 이 중 영국 사망자가 6만여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많을 것으로 내다봤다.

가디언과 텔레그래프 등 유력 언론들은 정치인의 오판과 자만이 사태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영국 정부는 공공의료시스템으로 충분히 코로나19에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틈만 나면 아시아 국가와 달리 영국은 선진적인 보편적 의료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영국 정부는 사태 초기 인구 중 대략 60%가 면역을 얻으면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집단면역’ 논리를 폈다. 휴교령과 외출금지령 등 봉쇄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전문가들의 잇단 경고에도 정부는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정부는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도 권고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강조한 것이 손 씻기였다. 그럼에도 존슨 총리 등 정치인들은 병원을 방문해 악수 등 신체 접촉을 거리낌 없이 했다. 정부가 일반인들의 마스크 착용을 처음으로 공식 권고한 건 지난달 30일이었다.

영국 정부는 다른 유럽 정부와 달리 봉쇄조치를 열흘 가량 늦게 발령했다. 바이러스는 영국 전역에 퍼진 뒤였다. 진단키트 등 검사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일선 현장에서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조차 제대로 된 검사를 받지 못했다. 확진 판정을 받은 존슨 총리는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기로를 오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존슨 총리는 복귀 후 첫 기자회견에서 “정부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적절한 대응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영국 성인 1654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1일까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는 영국 정부의 봉쇄조치 도입이 너무 늦었다고 답했다. 시기적절했다고 답한 비율은 29%에 불과했다. 영국 정부가 코로나19 확산 가능성에 대비해 제대로 준비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67%가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긍정적’이라고 답한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사태 초기만 하더라도 정부 비판을 가급적 자제했던 영국 언론들도 지난달부터 정부 책임을 거세게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를 이끌고 있는 존슨 총리가 60%에 달하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건 또 다른 얘기다. 보수당 출신 총리가 이 정도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는 건 수십년만에 처음이라는 것이 영국 언론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영국 유력 언론들도 정부 방역에 대한 비판이 많은 상황에서 존슨 총리의 지지율이 치솟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이렇다 할 분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