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조5344억원. 삼성전자의 지난 4일 종가 기준 시가총액이다. 코스피200 종목 전체 시총에서 30%를 넘어설 만큼 증권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시총 1위=삼성전자’ 공식이 자리잡은 것은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1997년 말 삼성전자의 시총은 3조7000억원에 불과했다. 시총 순위 역시 한국전력(9조7000억원), 포항제철(현재 포스코·4조3000억원) 등에 밀렸다.
3년 뒤인 2000년, 삼성전자는 완전히 다른 기업이 됐다. 시총이 23조7000억원으로 여섯 배 이상 늘면서 유가증권시장 1위로 발돋움했다. 이후 20년간 삼성전자는 1위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외환위기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외환위기가 버거운 것은 삼성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자금이 메말랐다. 삼성은 불요불급한 자산과 생산시설을 내다 팔아 현금을 확보했다. 전력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부천사업장을 미국 반도체 회사인 페어차일드에 4억5000만달러에 매각했고 한국휴렛팩커드와 삼성GE의료기기의 지분도 과감히 팔아치웠다. 이렇게 확보한 유동성을 연구개발(R&D)에 투입했다. 외환위기 이후 펼쳐질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제품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보고 신발끈을 조인 것이다. 삼성전자의 ‘캐시카우’ 노릇을 한 1GB D램도 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삼성전자는 이 제품을 외환위기가 한창이었던 1999년 6월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이후 삼성전자의 기술 공세는 갈수록 빛을 발했고 글로벌 대표기업으로 발돋움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웅은 현대자동차였다. 당시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은 붕괴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미국 차의 자존심으로 불리던 GM과 크라이슬러가 파산신청을 했다. 일본 도요타도 휘청거렸다. 금융위기로 판매가 급감한 2009년엔 대규모 리콜 사태까지 겪었다. 현대차는 달랐다. ‘어슈어런스 프로그램’으로 꽁꽁 얼어붙은 미국 소비자들의 마음을 돌렸다. 현대차를 구입한 뒤 1년 이내에 실직하면 차를 반납하라고 광고했다. 현대차의 공격적 마케팅 전략은 점유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2008년 현대차와 기아차를 합해 4.8%에 불과했던 미국 시장 점유율이 3년 만인 2011년 8.9%로 급증했다. 이 같은 변화는 시가총액에서도 드러난다. 2007년 말 15조7000억원이던 시총이 2010년 38조2000억원으로 급증했다.
시장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새로운 ‘기업 영웅’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경쟁국에 비해 한발 빨리 코로나19를 극복하면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박은진 IGM 세계경영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경쟁자들이 한두 발씩 후퇴하는 위기 상황이야말로 격차를 벌릴 기회”라며 “코로나19 이후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송형석/이수빈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