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이주' 고려인 이야기…"우리의 정체성은 뭔지 묻고 싶었죠"

입력 2020-04-28 17:11
수정 2020-04-29 01:25
“소설 속 모든 내용은 제게 던지는 질문이자 저와의 대화였어요. 모든 사람이 한곳에 정착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모두 어디선가 와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죠. 소설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도 커다란 세계 속 이주열차에 타고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난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숨 작가(46·사진)의 장편소설 《떠도는 땅》(은행나무)이 지난 27일 출간됐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흐르는 편지》 이후 2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이다. 28일 서울 합정동 카페에서 만난 김 작가는 “존재가 뿌리 뽑히고 삶이 왜곡돼 일생을 떠돌며 살았던 카레이스키들의 이야기”라고 새 소설을 소개했다. 카레이스키는 러시아 지역에 사는 한국인 동포를 일컫는다.

《떠도는 땅》은 1937년 연해주에 정착했던 고려인 17만 명이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사건을 기반으로 쓰여졌다.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나듯 화물열차에 태워져 수십 일간 미지의 땅으로 향해야 했던 고려인의 여정을 기록하며 뿌리를 잃고 떠돌았던 역사 속 작은 존재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또 다른 땅으로 떠돌게 되면서 모두 자기 존재까지 뿌리 뽑혀진 사람들이었죠. 이들은 그렇게 땅에 의해 인연의 끈이 단절됐지만 또 다른 땅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며 완전히 다른 인생의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왜 제목이 ‘떠도는 땅’일까. “인간의 육체는 하나의 땅 같아요. 죽어서 흙과 먼지가 되는 걸 보면 인간은 땅의 조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땅은 구름이나 물, 바람, 새처럼 정처없이 떠돌지 않고 고정돼 있죠. 그런 의미에서 땅처럼 정착돼 살고 싶지만 구름처럼 떠돌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주민들은 조선말과 글을 쓰며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한다. 정체성의 뿌리는 땅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기가 살던 땅을 추억하고, 욕망하며, 때론 저주하지만 결국 그 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조선인이란 뿌리가 있어야 살면서 러시아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흡수하고 인정할 수 있었죠. 당시 그들이나 지금 고려인 2·3세대 모두 그런 의식이 필요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너의 정체성은 뭐야’라고 물으며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씨앗을 받아줄 땅을 찾으러 간다’는 소설 속 문장이 인상 깊다. 작가도 소설 속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2부 후반부에 금실이 이주열차에서 아이를 잃은 요셉으로부터 ‘새로 도착한 땅에서 새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대목을 꼽았다. 그는 “씨앗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땅에 심으면 부활한다”며 “씨앗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어떤 땅이든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80여 년 전 이들의 처절했던 삶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인 강제이주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자비심이 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사건이었죠. 고려인 후세대들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많은 난민이 살 곳을 찾아 떠돌고 있습니다. 비슷한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죠. 소설을 통해 고려인 강제 이주의 역사는 지금 문제들과 연결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알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글=은정진/사진=허문찬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