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21일(07:34)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1대 총선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하자 금융 공기업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대통령과 여당이 총선 전부터 공공기관 이전을 공언한 상황에서 한국의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와 모태펀드 운용사인 한국벤처투자의 전주 이전을 공약으로 내건 김성주 전 국민연금 이사장(사진) 등 여당 후보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지방 이전이 거론되는 기관 내부에선 직원들의 동요가 커지고 있다. 주요 국가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뉴욕, 런던, 도쿄 등 핵심 도시에 역량을 집중하는 추세 속에서 한국만 ‘역주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 공공기관 줄줄이 지방으로 옮기나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15일 총선에서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공약으로 내건 여당 후보 다수가 당선되면서 금융공공기관의 지방 이전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총 153개 기관에 이어 122개에 달하는 기관을 추가로 지방으로 이전하는 ‘2차 공공기관 이전’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당차원에서 추진하는 핵심 공약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6일 “전국을 다녀보면 절실히 요구하는 게 공공기관의 지방이전”이라며 총선이 끝나면 공공기관 지방 이전 시즌 2를 할 것“이라고 밝힌 것이 대표적 예다.
초미의 관심사는 고급 인력들로 구성된 금융공공기관이다. KIC, 한국벤처투자를 비롯해 구조조정, 벤처육성 등 다양한 정책금융 업무를 담당하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 예금보험공사, 무역보험공사, IBK기업은행, 국제금융센터, 별정우체국연금관리단 등이 해당된다. 이 기관들은 구직자들 사이에서 ‘신의 직장’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고 그만큼 우수한 인재들이 몰리는 곳이다. 업무 특성 상 국내외 금융 기관 및 기업과의 교류도 많아 유치 시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끊임 없이 지방 이전의 압박을 받아 왔다.
금융권에서 이전지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은 2015년 국민연금이 이전한 전주다. 그 외에도 부산, 고양, 천안 등이 금융 공공기관 유치전을 벌이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국제 금융도시’를 기치로 금융 공공기관의 전주 이전을 공약으로 내건 김성주 전 국민연금 이사장(전주 병)을 비롯해 이상직 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전주 을)과 김윤덕 전 의원(전주 갑) 등 여당 정치인들이 전주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이들이 유치 대상으로 거론한 기관만 KIC, 한국벤처투자, 산업은행, 무역보험공사, 국제금융센터, 별정우체국연금관리단 등 10곳에 육박한다. 대부분 광화문, 강남 테헤란로 등 서울에 있는 기관들이다.
지방이전이 기정 사실화되면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직원들의 염원이자, 수익률 제고 방안 중 하나로 거론되던 서울사무소 설치는 이번 선거로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는 분위기다. 보건복지부의 자문기구인 국민연금 기금운용발전위원회는 전주 이전 이후 국민연금 기금운용역들의 퇴사가 줄을 잇는 등 문제가 불거지자 서울사무소 설치를 공식 권고한 바 있다. 우수 인력 확보와 인력 이탈 방지를 위해서다. 하지만 당시 국민연금 이사장이었던 김 당선자가 “편의상 서울로 이전해야 한다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고 반대해 결국 무산됐다. 한 국민연금 출신 인사는 “이미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던 이사장이 정치적인 판단을 한 것”이라며 “점점 더 전문화, 세계화되는 시장 환경에서 매일 혁신해도 모자란 금융기관들이 정치논리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국민연금될까...기관들 '난감'
이전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기관들은 울상이다. 다수 기관에선 벌써부터 인력 이탈 조짐이 보이는 등 내부 동요가 심각하다는 말이 나온다. 전주 이전 후 핵심 인력들의 이탈과 글로벌 파트너들과의 교류 축소로 인한 경쟁력 약화 등 후유증을 겪고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실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전주로 이전이 결정된 2016년 이후 극심한 인력 유출 사태를 겪었다. 기금운용본부의 전주 이전이 결정된 2016년 이후 작년 상반기까지 기금운용직 퇴사자 수는 107명에 달했다. 2015년까지 매년 10명 안팎에 머물렀던 퇴사자 수는 2016년 이후 연 30명 꼴로 늘어났다. 맞벌이 부부로 한창 자녀를 양육하고 있던 운용역 상당수가 서울의 민간 금융사로 대거 이직한 탓이다.
경험 많은 인력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그만한 인력을 채우지 못하는 구인난도 이어지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역 신규 채용자의 입사 전 운용 경력은 2014년 9.7년에서 지난해 6.1년까지 줄어들었다. 국민연금 눈높이에 맞는 인력 확보에 실패하자 작년부턴 그간 뽑지 않았던 3년 이하 경력자들도 뽑기 시작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한 때 금융권 종사자 사이에서 국민연금으로의 전직은 실력을 인정 받는 관문으로 여겨졌지만 이젠 옛말”이라며 “KIC 등 업계의 내로라하는 인재들만 가던 기관들의 경쟁력도 크게 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 이전은 국민연금의 경쟁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국민연금이 시장 대비 얼마나 운용을 잘 했는지 평가하는 지표인 벤치마크 대비 수익률은 2017년 0.86%에서 2018년 -0.63%로 떨어졌다. 2013~2017년 평균(-0.06%) 보다도 낮은 수치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11.3%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지만 국내주식(2.38%)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선 시장 대비 유의미한 성과를 내진 못했다.
업계는 이 정도 성과도 전주 이전 이후 국민연금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비하면 선방한 결과로 보고 있다. 국민연금 운용역들은 전주 이전 이후 실장급의 서울 출장 시기를 맞춰 운용역들이 단체로 위탁운용사나 관계기관과 미팅을 잡고 출장 가는 비정상적인 업무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블랙스톤, 칼라일, KKR, 브룩필드 등 글로벌 운용사들이 전주 방문을 꺼리면서 이들의 방한 일정에 맞춰 서울에 올라가는 것도 국민연금 직원들의 일상이 됐다. 주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엔 정해진 근무 시간이 끝나면 컴퓨터가 꺼지는 PC 온·오프제까지 시행되고 있다.
국민연금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가장 큰 문제는 전 세계 선진 연기금들과 밤낮없이 경쟁하며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할 국민연금 운용역들이 ’적당히‘ ’눈치보며‘ ’안전하게‘ 일하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라며 “금융 공공기관의 추가 이전은 하향 평준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