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안된 첫 기본소득 지급 '대혼란'

입력 2020-04-20 17:31
수정 2020-10-15 15:47

“장난쳐? 문자로 알려줬어야지 왜 헛걸음질하게 하나.”

20일 오전 8시30분 경기 부천시 심곡동 행정복지센터 3층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공무원과 주민 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경기도에서 주는 재난기본소득을 받으러 온 60대 남성은 “가구원이 4인 이상이 아니면 돌아가라”는 직원의 말을 듣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담당 직원이 “전 국민의 휴대폰 번호를 알 수는 없지 않냐”고 하자 이 남성은 “전 국민이 아니라 경기도민만 대상이잖아. 경기도민!”이라고 고성을 질렀다.

같은 날 수원시 인계동 행정복지센터에도 오전 8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행정복지센터는 오전 9시에 문을 열지만 대기 인원이 30명을 넘어가자 직원이 나와 손으로 쓴 번호표를 나눠줬다.

오전 10시가 되자 150개의 번호표가 동이 났다. 뒤늦게 온 사람들은 “오전 9시 개장이면 9시부터 순서대로 들여보내야지 미리 왔다고 번호표를 주는 게 말이 되냐”고 항의했다. 80대 어머니를 모시고 온 50대 박모씨는 “이렇게 좁은 곳에 사람들을 다 모아두면 어떻게 하느냐. 돈 10만원 받으려다 어르신 중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리는 사람이라도 나오면 어쩔 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도는 이날 처음으로 전 도민을 대상으로 한 재난기본소득(1인당 10만원)을 행정복지센터를 통해 지급했다. 대상은 경기도 모든 주민 1360만 명이다. 신용카드와 경기지역화폐카드가 있는 사람은 지난 9일부터 온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었지만, 절반 정도의 주민이 읍·면·동 행정복지센터(544곳)와 농협 지점(1042곳)을 방문해 선불카드를 받을 것으로 예측됐다.

경기도는 현장 지급 시 사람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출생연도 끝자리에 따라 방문 요일을 달리하는 ‘5부제’를 적용했다. 여기에 4인 이상 가족은 이날부터 오는 26일까지, 3인 가구는 27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등으로 신청 기간을 나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에 첫날부터 방문자의 절반 이상이 헛걸음했다. 행정복지센터마다 지급 절차도 제각각이어서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공무원도 시민들도 모두 '우왕좌왕'…경기도 기본소득 지급 첫날
센터에 한꺼번에 수백명 몰려…"무슨 배급제도 아니고…" 분통


경기도가 재난기본소득을 현장 지급한 첫날인 20일 행정복지센터(주민센터)마다 수백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부 행정복지센터에서는 공무원들이 과중한 업무에 지쳐 주민을 밀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공무원들도 ‘혼란’

이날 한국경제신문 취재진이 방문한 수원 부천 광명 성남 등의 행정복지센터에는 한 곳당 100명 이상의 인원이 방문했다. 공무원들이 “줄 간격을 1m 이상 벌리고 질서를 지켜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를 제대로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광명시 철산4동 행정복지센터에서는 대기줄이 무너지고 공무원에게 몰려가 신청 절차를 문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자 한 공무원이 “이래서 업무가 제대로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한 민원인의 어깨를 미는 바람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경기도는 신용카드나 경기지역화폐카드가 있는 사람은 온라인으로 재난기본소득을 신청할 수 있게 했다. 지난 9일부터 온라인 신청을 받았는데 19일까지 전 도민의 43.9%가 신청했다. 온라인 신청은 오는 30일까지 받는다.

경기도는 미성년자 등은 신용카드가 없는 경우가 많고 어르신들은 온라인에 취약하기 때문에 도민의 절반가량은 오프라인(방문) 신청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경기도는 행정복지센터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구원 수와 출생연도 끝자리에 따라 방문일을 달리했다. 하지만 이날 행정복지센터 방문자 중 상당수가 이 같은 사실을 몰라 발길을 돌려야 했다.

출생연도 끝자리에 따라 방문 요일이 정해져 있는 ‘5부제’는 공적 마스크 판매 때 적용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대리 신청 시에는 신청인(대리인)의 출생연도 끝자리를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위임인의 출생연도를 기준으로 하는지 공무원들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성남의 한 행정복지센터에서는 “누구 출생연도를 기준으로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받은 공무원이 대답을 못하자 상급자가 “신청인 기준”이라고 대신 답해주는 상황도 있었다.

성남 태평2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만난 50대 남성은 “어차피 전 도민 대상으로 지급하는데 공무원들이 각 가정을 방문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배급제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 줄을 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선불카드, 벌써 온라인에선 할인 판매

이날 재난기본소득이 담긴 선불카드를 받은 도민들은 “사용처가 어디인지 궁금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성남시에 사는 직장인 윤모씨(62)는 “대형마트나 온라인에서는 쓸 수 없다고 들었다”며 “생각보다 사용처가 적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 행정복지센터에서는 노인들이 “술을 사먹을 수 있나”라고 문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재난기본소득으로 지급된 선불카드가 ‘깡(할인매매)’의 대상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서울시 부산시 대전시 등이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저소득층에 지급한 선불카드가 인터넷 중고시장에 할인된 가격에 올라오고 있어서다.

이날 한 중고거래 사이트에는 대구시가 발급한 50만원짜리 긴급생계자금 선불카드가 41만원에 판매되고 있었고, 부산시의 부산사랑카드는 40만원짜리가 34만원에 매물로 나왔다. 62만원이 담긴 대전시의 긴급재난생계지원금 선불카드도 60만원에 판매한다고 올라왔다. 경기도의 경우 17개 광역지자체 중 인구가 1360만 명으로 가장 많고 지급 대상도 전 도민이라 인터넷에 ‘깡’ 물량이 쏟아질 것이란 우려도 있다.

부천=김남영/수원=최다은/광명=정지은/성남=양길성 기자 ny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