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위젤(사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증언과 고백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28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15세 때 가족과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됐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고, 부헨발트 수용소에서는 아버지가 독일군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그는 1956년 발표한 자전적 장편소설 《밤》을 통해 15세 소년의 눈에 비친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표현한 가장 중요한 저작물로 꼽힌다. 내전과 인종 대학살 같은 위기에 처한 인류의 참상을 알리고 해결하는 데 앞장선 위젤은 198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2016년 타계한 위젤은 생전 미국 보스턴대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할 때 매주 수요일에 세계 각지 학생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는 수업을 했다. 위젤의 강의가 25년 동안 보스턴대에서 그의 곁을 지켜 온 제자 아리엘 버거에 의해 책으로 되살아났다.
《나의 기억을 보라》는 2005년 12월 강의로 시작된다. 수업이 끝날 무렵 한 학생이 “홀로코스트 이후 자신을 지탱해준 건 무엇이냐”고 묻자 위젤은 “배움이 나를 구원했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 목격자의 이야기를 경청함으로써 우리는 현재 중요한 목격자가 될 수 있다”며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면 그 중심엔 분명 교육이 자리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교육의 힘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위젤의 확고한 믿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위젤 역시 교육과 지식이 갖는 한계로 고통스러워했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왜 배움과 지식으로도 홀로코스트 당시 독일 사람들은 증오심에 저항할 수 없었는가’라는 의문이었다. 나치 친위대 장교들은 위대한 철학가들의 사상을 공부하고 윤리와 도덕 개념을 탐구하고서도 유대인 대학살이란 끔찍한 일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위젤은 이런 윤리적 타락을 이겨내는 숨겨진 요소를 찾는 연구에 평생을 천착했다”며 “이 요소만 찾는다면 지식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고, 그 지식이 쌓여 증오가 아닌 공감과 동정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평생 강의를 통해 그 실험을 거듭하던 위젤은 결국 숨겨진 요소를 찾아낸다. 저자는 “위젤은 강의할 때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 ‘기억’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고 회상한다. 위젤은 1986년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기억입니다.” 저자는 “역사에 대한 무지로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더라도 정보를 기술적으로만 전달하는 일 역시 비극을 막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며 “만일 기억을 통해 어떤 도덕적 변화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기억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먼저 찾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책은 위젤이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의 아팠던 기억도 담아낸다. 저자는 “모두가 성숙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돼 힘도 영향력도 없이 외면당하고, 차별과 배제 속에서 위기에 처한 이들을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쓰는 것이야말로 위젤이 말한 인류애”라고 강조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