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러시아 원유 증산 전쟁…美 "전략비축유 늘린다"

입력 2020-03-15 17:19
수정 2020-06-13 00:02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유가 전쟁에 도박을 하고 있다. 그의 무모한 움직임은 1991년 미국이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폭격하기 시작한 이후 가장 가파른 유가 하락을 촉발시켰다.”(미국 CNN방송)

‘검은 황금’ 석유를 둘러싼 미국, 사우디, 러시아 간 패권 전쟁이 주요 산유국 간 ‘치킨 게임’으로 번지고 있다. 사우디, 러시아에 이어 아랍에미리트(UAE)까지 증산 경쟁에 가세했다. 이들은 원유 감산 합의에 실패한 뒤 오히려 공격적인 생산량 확대 계획을 밝히며 상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유가가 가파르게 하락하면서 셰일오일 업체의 어려움이 커지자 미국까지 참전을 선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원유시장 부양을 위해 전략비축유 대량 매입을 에너지부에 지시했다.

치킨 게임 벌이는 산유국들

사우디는 지난 11일 원유 생산량을 하루 평균 1300만 배럴까지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원유 생산량을 줄여 최근 970만 배럴 수준으로 낮췄으나 갑자기 34%가량 증산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러시아 정부도 즉각 “50만 배럴 증산도 가능하다”고 맞받아쳤다. 러시아는 하루 평균 1140만 배럴을 생산한다. 그러자 UAE는 “4월부터 하루 산유량을 300만 배럴에서 400만 배럴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산유국 간 전쟁에 국제 유가는 요동쳤다.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원유(WTI)는 13일 배럴당 31.73달러를 기록했다. 지난 한 주 동안 22%가량 폭락했다. WTI 가격은 올해 초인 지난 1월 6일 배럴당 62.69달러와 비교하면 반 토막이 됐다.

앞서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주요 산유국과 추가 감산을 논의했지만 러시아의 반대로 합의하지 못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저유가로 나라의 핵심 돈줄인 국영석유회사 아람코가 어려움을 겪으면 왕좌도 위태로워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국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원유 감산을 원치 않는다. 원유 감산이 유가를 올려 상대적으로 채굴 단가가 높은 미국 셰일업체의 시장 진입을 돕는다는 인식도 갖고 있다.


100년 넘은 오일 패권 전쟁

오일 패권의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을 드러낸 결정적 계기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 전함의 40%는 석유 동력으로 바뀌었다. 1914년 프랑스 군대는 비행기 132대를 보유했지만 1918년에는 100배 가까이 증가한 1만2000여 대로 늘었다. 연합국 석유의 80%를 공급한 미국의 뒷받침이 컸다. 전시 석유위원장이었던 앙리 베랑제 프랑스 상원의원은 석유가 ‘승리의 피’였다고 회고했다.

석유 생산지로서 중동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920년 영국은 중동 지역의 석유 이권을 장악한다. 당초 독일이 갖고 있던 이라크석유회사(IPC)의 지분 25%를 프랑스에 떼어주고, 나머지는 영국이 차지했다.

이후 유전 개발 등으로 산유량이 크게 증가한 미국과 영국은 1928년 원유 가격 안정을 위한 ‘현상 유지(as-is)’ 비밀협약을 맺는다. 이 아크나캐리 협정은 당시 석유 메이저 총수들이 스코틀랜드 아크나캐리의 고성에 모여 체결했다. 석유 생산량 동결, 잉여 원유는 약정 가격에 협정 참여자에게만 판매, 제3자로부터의 원유 구매 금지 등 7개 항에 합의했다. 미·영 석유 카르텔의 시작으로, 이들의 합의는 1973년 1차 석유파동 때까지 유지된다.

석유 전쟁에서 힘 커진 중동

1960년에는 OPEC이 등장했다. 사우디 등 중동 산유국들은 서방의 석유 메이저가 국제 유가를 결정하는 구조를 견제하기 위해 OPEC을 출범시켰다. 이후 1970년대 1차 오일전쟁과 1980~1990년대 2차 오일전쟁을 일으키며 세계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차 오일전쟁(1973~1981년)은 1973년 이스라엘-아랍국 간 4차 중동전쟁과 함께 일어났다. 아랍 산유국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감산을 통한 원유 가격 인상을 선언하고 미국에 석유 수출을 전격 금지했다. 이 여파로 1973년 초 배럴당 3달러였던 유가는 1년 만에 12달러로 4배 가까이 올랐다. 이후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이 도화선이 되며 유가 인상은 더욱 가팔라졌다. 이란이 유전 노동자 파업으로 석유 수출을 중단하자 유가는 배럴당 30달러 시대를 열었다.

2차 오일전쟁(1981~1998년)은 거꾸로 기록적인 저유가 시대를 불러왔다. 1970년대 오일 쇼크에 놀란 선진국들이 대체 에너지 개발에 주력한 데다 북해 유전 개발 등으로 석유 공급이 과잉되면서 유가가 곤두박질쳤다. 한때 배럴당 40달러를 넘었던 유가는 1986년 10달러대까지 떨어졌다.

영국의 가격 자유화 선언(1985년)은 유가 하락에 불을 댕겼다. 석유 가격 결정권이 서방에서 OPEC으로 넘어간 것을 못마땅해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가격 자유화로 OPEC의 맏형 사우디를 정조준했다. 사우디는 증산으로 응수했다. 1986년 산유량을 200만 배럴에서 1000만 배럴로 대폭 늘리면서 저유가 기조는 1998년까지 고착화됐다.

그러나 1990년대 저유가는 미국의 시나리오였다는 주장도 나온다. 옛 소련 봉쇄 정책을 폈던 미국이 석유에 의존하던 소련의 계획경제에 타격을 주기 위해 사우디와 합작해 저유가 시대를 지속시켰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저유가는 소련 붕괴의 도화선이 됐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