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라 경기침체 극복을 위해 250억유로(약 34조원) 규모의 EU 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부채증가 우려에도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회원국들의 요청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EU 행정부 수반 격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사진)은 10일(현지시간) EU 27개 회원국 정상들과 코로나19 대응책 논의를 위한 긴급 화상회의를 연 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 같이 발표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우선 EU 자체기금으로 75억 유로(10조2000억원)가량의 재원을 조달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 자금은 향후 몇 주 내에 코로나19로 타격을 받고 있는 보건 시스템과 중소기업 등에 지급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모든 필요한 수단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그는 각 회원국들의 공공 지출을 늘리기 위한 국가 보조금에 대한 EU 재정규정과 규제도 완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코로나19에 따른 경기부양을 위해 EU 재정준칙의 예외조항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통화정책은 유럽중앙은행(ECB)이 맡지만 재정정책은 회원국이 독자 운영한다. 회원국의 경제적 격차 축소 및 재정위기 확산을 막기 위해 EU는 재정정책 준칙인 안정·성장협약(SGP)을 시행하고 있다. 재정적자는 GDP의 3% 이내, 정부부채는 GDP의 60% 이하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2011년 유로존을 강타한 재정위기 이후 재정준칙은 엄격하게 지켜져 왔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비상사태 극복을 위해 재정준칙을 완화하겠다는 것이 EU의 새로운 방침이다. 유럽질병예방통제센터(ECDC)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이날 오후 6시 기준 1만149명으로, 1만명을 넘어섰다.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도 확진자 수가 1000명을 넘었다. 독일을 제외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3개국은 유럽에서 정부부채 비율이 높아 재정위기 우려가 높은 국가로 손꼽힌다.
당초 EU 집행위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프랑스와 스페인 등의 재정지출 확대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이었다. 2011년 재정위기를 겪었던 그리스보다 경제 규모가 열 배 가까이 큰 이들 국가에서 재정위기가 불거지면 유로존 전체로 위기가 확산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코로나19 확진자가 유럽 전역에서 급증하면서 EU가 방침을 바꿨다는 것이 현지 언론들의 분석이다.
ECB도 경기부양을 위해 집행위 방침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날 열린 집행위와 27개 회원국 정상들 간 화상 회의엔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도 참석했다. ECB는 오는 12일 공식 통화정책회의를 열어 금리인하 및 양적완화 확대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EU가 직접 나서 마스크 등 위생물품 공급을 조율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EU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을 비롯해 재정상태가 양호한 북유럽 국가들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EU 기금을 사용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독일 정부는 회원국들이 경기부양 및 자국 기업을 지원하려면 자체 예산을 활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EU 관련 전문매체인 유랙티브닷컴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독일 등 북유럽 국가와 재정상태가 취약한 남부유럽 국가들 간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