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맹주' 이란의 비극…트럼프 제재로 친중노선 걷다 '코로나 참극'

입력 2020-03-10 17:28
수정 2020-06-08 00:03

현직 부통령과 스무 명이 넘는 국회의원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중국과 이탈리아 다음으로 많은 코로나19 사망자, 중동 전체로 바이러스를 확산시킨 ‘중동의 우한’이라는 오명….

중동의 맹주로 꼽히는 이란이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겪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이다. 이란이 이렇게 맥없이 코로나19에 무너진 것은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와 미국의 제재로 인한 의료 물품 부족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란의 비극은 2018년 5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이란 핵합의(JCPOA) 탈퇴를 공식 선언하면서부터 사실상 시작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은 합의 이후에도 핵무기 프로그램을 계속 추진해왔다”며 강도 높은 경제 제재를 다시 가했다. 이란 핵합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5년 7월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등 6개국이 이란과 체결한 협정이다.

미국의 제재로 사실상 세계와 교역이 막힌 이란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기존 제1교역국인 중국과의 협력 확대였다. 중국은 이란의 제1 교역국이 됐다. 중국은 미국 제재 발동 이후에도 암암리에 이란산 원유 등을 대거 수입했다. 이란은 중국산 제품을 수입해 중동 시아파 국가에 되파는 중개 역할을 해왔다. 지난달 19일 이란에서 처음 나온 코로나19 확진자도 중국과 이란을 오가는 무역업자였다. 그는 중국행 직행 노선이 끊기자 경유 노선을 통해 중국을 수차례 다녀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은 각종 인프라 사업에도 중국 자금을 끌어 쓰고 있다. 중국은 중동 내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란에 지원과 협력을 확대했다. 이란 고위급 인사들이 코로나19에 걸린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 이후 중국과 정부·민간 협력이 크게 늘면서 감염원과의 접촉이 많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의료 시설과 의약품 등까지 부족해 이란은 코로나19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란은 미국의 제재 이후 무역 등을 중국에 의존했고, 이 때문에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퍼지는 동안 자국의 유입을 막기 위한 대처를 빨리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란 보건부에 따르면 10일(현지시간) 기준 이란 내 코로나19 확진자는 8042명에 달한다. 중국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3위다. 이란의 코로나19 사망자는 이날까지 291명이다. 이 역시 중국(3136명)과 이탈리아(463명) 다음으로 많다.

이란 보건부에 따르면 지난 6일을 기해 코로나19가 이란 31개 주 모두에 퍼졌다. 의료 서비스 접근성이 높은 고위층도 줄줄이 감염됐다. 아야톨라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의 자문단에 속한 무함마드 미르 모함마디 국정조정위원회 위원은 2일 코로나19로 숨졌다. 현직 국회의원과 전 법무부 장관, 전 외교대사 등도 연이어 사망했다. 마수메 에브테카르 부통령과 스무 명 넘는 국회의원은 확진 판정을 받아 치료 중이다.

이란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전례없는 조치까지 내놨다. 9일 죄수 7만 명을 약 한 달간 풀어주기로 했다. 이란 사법부는 매년 새해 연휴에 모범수를 일시 석방하지만 이번엔 규모와 기간을 기존보다 크게 늘렸다. 현지 언론은 교도소 내에서 집단 감염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라고 전했다.

이란 사법부는 마스크와 손소독제 등을 사재기하면 최고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엄포도 놨다. 도시 간 이동 금지 조치를 내리고, 이를 어길 경우 무력 조치를 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미국의 제재로 서방국가와 보건용품, 의약품 등을 거래하기 힘든 상황이어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란은 세계보건기구(WHO)와 중국 등에서 기부를 통해서만 코로나19 관련 용품을 받고 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