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코로나19 대응체계 '옥상옥' 될까 두렵다

입력 2020-02-25 18:35
수정 2020-02-26 00:17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서, 그러나 꾸준히 메시지를 던졌다. 지난 1일 “위험 지역 입국자 규모를 줄이면 안전하다는 게 방역의 기본 원칙”이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중국이라는 고위험 지역의 입국자가 아무도 안 들어오는 게 가장 안전하긴 하다”(4일) “방역하는 입장에서 고위험군이 덜 들어오는 게 좋은 것은 당연하다”(19일) 등 비슷한 말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선 중국인 입국 제한을 폭넓게 시행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정부는 이달 초 중국 후베이성 방문 외국인을 대상으로만 입국금지 조치를 내린 이후 이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감염병 위기 경보 문제도 비슷했다. 정 본부장은 21일 “경보 단계를 ‘경계’에서 ‘심각’으로 상향하는 것을 건의한 적이 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항상 논의드리고 있다”고 답했다. 정부는 23일에야 심각으로 올렸다. 뒷북 대응이란 비판이 나왔다.

질병관리본부는 감염병 분야 최고 전문가 집단이다. 이번 사태 초기부터 전문가들은 “질본이 컨트롤타워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질본의 목소리는 다른 행정부처의 입김에 번번이 막혔고, 이는 감염병 확산을 키운 주요 원인이 됐다는 목소리가 크다.

정부는 23일 코로나19 대응 체계를 바꿨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았던 중앙사고수습본부 체계에서 국무총리가 수장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체계로 격상시켰다. 총리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을 맡은 것은 사상 처음이다.

정부의 강력 대응 의지를 보여준 것이지만 ‘개악’이라는 의견이 많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는 24일 “현장을 잘 아는 질병관리본부장 위에 전문성이 떨어지는 장관에 이어 총리까지 앉게 됐다”며 “보고와 결재, 허가를 받아야 할 단계가 하나 더 생긴 셈”이라고 비판했다. 박종혁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질본에 힘을 더 실어줘도 모자랄 판에 거꾸로 갔다”고 했다.

국가 재난사태 시 힘있는 기관이 컨트롤타워를 맡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고 직급이 높은 게 현명한 결정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올바른 결정은 전문성에서 나온다. 총리실의 역할이 있다면 질본의 전문성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좋은 사례가 있다. 사상 최악의 테러로 평가받는 2011년 9·11 사태 직후 미국 항공 역사상 전례 없는 결정이 내려졌다. 미국 영공을 날고 있던 항공기를 모두 착륙시키라는 것이다.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은 대통령이나 장관이 아니라 미 연방항공청의 실무국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