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는 주민의 전용 영역, 주민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영역, 주민이 아니더라도 들어갈 수 있는 영역으로 나뉜다. ‘사(私)·공(共)·공(公)’의 관계다. 이때 복도나 홀 등의 공용공간인 공(共)은 사(私)와 공(公) 사이에 놓인다. 이 공용공간은 각자의 전용면적에서 잘라낸 것인데, 이렇게 만들어놓은 공(共)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아파트만 그런 게 아니다. 공공건축물도 예산을 절감한다고 공용면적부터 줄이고 있으니 공(共)을 사용할 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공유와 사유, 공익과 사익이라고 하듯이 공(公)과 사(私)는 양분돼 있다. ‘공적인 것’은 국가가 구현하는 것이고, ‘사적인 것’은 자본과 시장이 지배한다. 이때 공공성은 사유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공존의 가치를 만들어주고, 시민과 시민 사이, 국가와 시민 사이를 메우며 인간다움을 확보해 주는 구체적인 가치로 믿고 있다. 그럼에도 공공성은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공적인 의무로 작용한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공공(公共)은 공(公)과 같은 말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공(公)에 의한 사회기반을 정비해 재산과 생명을 지켜준다. 토지가 있는 주거를 개인이 소유하게 했고, 편리하고 안전한 주택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했다. 그러나 공(公)은 본래 균질한 것이다. 이런 공(公)은 사(私)를 핵가족처럼 닫힌 것으로 만들어 국가 등의 사회제도에 의존하게 했다. 한편 경제성장으로 거대해진 상업시설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생활의 풍경을 서비스 영역으로 바꿨다. 이러는 과정에서 사(私)는 상업공간에 의존하며 공(共)을 잃어버렸고, 공(共)은 공(公)의 전유물이 됐다.
이에 건축가들도 “사적인 영역의 공공성 확보”라며 거들고 있다.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사적인 것이 왜 공공성을 확보해야 하는가가 분명하지 않다. 또 “공공성을 고려한 공간은 일반인들이 자연이나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게 해준다”고 하니 이 정도면 공공성은 건축의 묘약이다. “건축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한 건축법의 규정을 받으므로 모든 건축은 공공성을 띤다”고도 말하는 이가 있다. 그렇다면 법의 규정을 받는 산업은 모두 공공적인가? 심지어 “건축은 공공재”라고까지 규정한다. 공공재란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소비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인데, 대부분의 공공재는 국가가 제공한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이라면 이는 무서운 말이다. 건축계는 분명하지 못한 말을 이렇게 주고받으며 착각을 조장하고 있다.
공공(公共)은 공(公)과 공(共)을 합친 말이다. 그러나 이 ‘공(共)’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법은 땅을 공(公)과 사(私)로 나누지만, 엔트로피 경제학은 공과 사가 근거하는 공(共)을 자원으로 본다. 공기, 물, 햇빛, 산 등 자연만이 아니라 도로, 교통, 상하수도 등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자원이 모두 공(共)이다. 또 그것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도 공(共)이다.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커먼즈(commons)’는 공유자산과 공유 활동을 말하는데, 이는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던 공유지에서 유래한다. 곧 공(共)은 사(私)와 공(公)의 바탕이지, 사(私)와 공(公)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의 몸에는 공(共)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 아이들은 길에서 야구도 하고 광장에서 공도 차며 계단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우리의 몸 안에 공간을 공유할 줄 아는 힘이 이미 있다는 뜻이다. 돈을 주고 산 음원은 혼자 듣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영국에선 펍에 모여 가볍게 술 마시며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문화를 공유한다. 사람의 몸이 공(共)의 자원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인류가 시작했을 때 공(公)이 먼저 있었을까, 공(共)이 먼저 있었을까? 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공통적인 것’, 곧 함께 나누고 있던 공(共)이었다. 사(私)와 공(公)은 모두 공(共) 위에 놓여 있다. 공(共)이 없으면 사(私)도 없고 공(公)도 없다. 공공성은 이기적인 사(私)를 통제하는 특효약이 아니다. 공공(公共)이란 공(公)의 힘으로 개인과 사회에 잠재해 있는 공(共)을 확장해 주는 것이다. 현대건축이 펼쳐야 할 공공성이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