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지날 때면 집안엔 빗물이 들이치고, 날이 개도 햇볕은 반쯤만 들어와 눅눅함이 가시지 않는 집. 거주하는 사람의 옷과 몸에도 배는 곰팡이 냄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나온 반지하의 풍경이다. 영화에서 반지하는 계층의 격차와 경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지하는 아닌데 그렇다고 지상도 아닌 곳, 아무리 잘 꾸며도 셋방살이의 궁핍함이 감춰지지 않는 곳. 반지하는 언제부터 집이 됐을까.
◆집이 된 방공호
영화 속 기우네 반지하방 풍경이 반향을 일으킨 건 대중에게도 친숙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갓 상경한 대학생이나 살림이 넉넉지 않은 신혼부부들이 ‘복덕방’ 사장님들에게 이끌려 한 번쯤은 봤음직한 곳이다.
반지하가 처음부터 주택으로 보급됐던 것은 아니다. 탄생은 남북관계와 연관이 깊다. 1968년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기습한 ‘김신조 사건’이 발단이다. 안보 위기가 고조되자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유사시 서울시민 대부분을 대피시킬 수 있는 방공호 용도의 지하시설을 짓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건축법’이 이에 맞춰 개정되면서 2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땐 지하층 설치가 의무화됐다. 대부분의 주택이 지하 공간을 갖게 된 이유다.
처음엔 창고나 보일러실 정도로 쓰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산업화와 맞물려 인구가 증가하면서 점차 주거공간으로 전용되기 시작했다. 집주인 입장에선 남는 공간을 셋방으로 돌리면 따박따박 여윳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지하엔 거실을 두는 게 불법이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론 주택으로 활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75년 다시 건축법이 개정되면서 환기나 위생 등에 지장이 없을 경우 거실 설치가 가능해졌다. 방공호를 집으로 쓰는 게 사실상 공식화된 것이다.
반지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984년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임대주택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다세대주택이 법제화되면서 관련 규제도 완화됐다. 땅 속으로 2분의 1만 들어가 있어도 지하층으로 인정됐다. 1990년엔 다가구주택이 도입되고 정부가 세제 혜택 등으로 건설을 촉진하기까지 했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과 교수는 “벽의 절반 이상이 땅에 묻힌 지하층은 건물의 층수나 용적률 계산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주택용 반지하가 증가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이 마련됐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나
지하나 반지하주택은 옥탑방, 고시원과 함께 ‘지·옥·고’로 불리며 주거빈곤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정작 거주하는 가구의 비율은 감소하는 추세다.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선 전국 기준 3.0%였지만 2015년엔 1.9%로 줄었다. 서울은 같은 기간 8.8%에서 6.0%로 감소했다.
우선 공급이 줄었다. 2000년대 초반을 전후해 지하층 의무설치 규정이 폐지되고 반대로 주차공간 확보 규제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반지하방을 두기보단 필로티 구조를 적용해 1층 공간을 주차장으로 쓰는 건물이 늘었다. 재개발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반지하방을 끼고 있던 낡은 다세대·다가구주택들이 사라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수요도 감소했다. 오피스텔이나 원룸 등 훨씬 질 좋은 대체주택이 등장한 데다 공공주택 보급도 꾸준히 이어져서다. 서울 신림동 A공인 관계자는 “돈이 모자란 학생들도 같은 값이면 차라리 반지하보단 옥탑방을 선택한다”며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는 데다 위생 여건이 열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부동산 투자자들에겐 오히려 인기다. 재개발구역의 반지하방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새 아파트 입주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조합원분양을 받을 땐 차액만큼의 추가분담금을 내야 하지만 통상 그 전에 웃돈을 받고 되판다. 지난달엔 거여·마천뉴타운의 전용면적 16㎡짜리 한 반지하주택이 5억2000만원에 매매되기도 했다. 3.3㎡당 1억원을 웃도는 가격이다. 마천동 B공인 관계자는 “투자금이 적기 때문에 인기가 높지만 세입자를 구하기 힘들어 열에 아홉은 공실로 방치된다”며 “재개발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될 경우 자칫 골칫덩이로 전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