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길헌 화백, '세상 숨결'에 30년 천착…"현란한 추상미학으로 변주"

입력 2020-02-09 17:01
수정 2020-02-10 03:19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절대의 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지는 않으나 바람처럼 도처에 살아 있는 실체, 느낌으로서 존재하는 세상의 형상에 천착했다.”


지난 30여 년간 색채 추상화의 외길을 걸어온 서길헌 화백(61)이 캔버스를 붙들고 끊임없이 되뇐 말이다. 서 화백은 젊은 시절 세상이 보여주는 어느 순간의 형태가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를 찾고 싶었다. 세상이 어느 것 하나 제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매번 달라지는 거대한 추상으로 보였다. 그래서 세상의 형태를 알 수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은 다음 그 부유하는 파편들에 몰두하면서 일순간 깨우침을 얻으려 노력했다. 해체가 미덕인 시대에 서 화백의 경이로운 통찰력에 흥미가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이달 27일까지 여는 서 화백의 개인전은 초월론적 사유와 미술의 시각적 유희를 먹음직스럽게 버무렸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서 화백은 전시회 주제를 ‘세상의 모든 숨결’로 정한 뒤 세상을 보고 가슴에서 배어나는 울림을 현란한 색채 언어로 묘사한 근작 20여 점을 걸었다. 마음속 사유의 언어를 마치 철학자처럼 화면에 끄집어낸 작품들이다.

그는 “눈을 감아도 빛이 아른거리는 세상의 이미지들이 환영처럼 끝없이 부유한다”며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미지를 시각 언어로 아울렀다”고 말했다. 끼니 걱정을 하면서도 그림을 자기 수행이라 생각하기에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화가의 회한이 사무친다.

서 화백의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성’을 현란한 색채로 묘사한 게 특징이다. 그가 잡아낸 세상의 형상은 심장처럼 박동하기도 하고, 눈과 손이 여러 개 달린 천수천안관음도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화면에 기괴한 형상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 형태는 고궁의 단청 같은 화려한 원색으로 되돌아오는 원환적(圓環的) 구성이 돋보인다.

그의 작업 태도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들뢰즈는 “모든 곳에는 신이 지나간다”며 “진정한 작가적 태도는 신이 왔다가 가는 그 순간을 명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 화백이 본 것들 역시 어쩌면 신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의 ‘신성한 숨결’ ‘너그러운 신성’ 시리즈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형태와 색을 비롯한 모든 조형 요인은 서로 뒤엉켜 ‘하나의 신체’를 이룬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같이 움직이고 회전한다. 색채의 율동은 시간을 초월한 듯한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 신의 지나감(깨달음)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시각적 자극을 넘어서는 난해함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서 화백에게 “그림이 어려운데 관람객과의 소통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자유분방한 필체와 원색 대비로 우주의 형상을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게 제가 도달해야 할 영역”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저에게 회화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재론적인 숨결로부터 나오죠. 그 숨결은 유한한 삶이 뿜어내는 불가해한 색깔이라든가, 끊임없이 변이하는 세계의 물질이 빚어내는 비속한 형용들입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대학 팡테옹 소르본 조형예술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서 화백은 “대상, 색감, 질감 등 회화의 고유한 특질을 바탕으로 실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화면에 올려놓았다”며 “눈을 감고 수정체 표면에 맺힌 환상을 잡아내 시각예술로 재현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란 초월적 영역을 향해 비상했던 화가는 이제 우주의 가녀린 숨결을 수놓고 있다. 그는 무엇을 보고 그렸을까. 화가는 자신이 그린 ‘세상의 주인’처럼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짤막한 순간의 연속으로 이뤄집니다. 모든 일은 순간적으로 지나가지만, 시간 속에서 기억이라는 형태의 흐름으로 지속되죠.”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