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성과 수치화에 집착…'측정강박'에 빠진 사회

입력 2020-01-16 14:17
수정 2020-01-17 00:39
현대인의 삶은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사고과로 대변되는 일터와 조직 내 평가 문화는 견고하게 자리잡았다. 측정과 평가를 통해 성과를 창출하려는 시도는 기업뿐 아니라 공공기관·단체로 확대돼왔다. ‘성공의 열쇠는 성과 평가에 있다’, ‘숫자는 객관적이며 신뢰할 수 있다’는 명제가 여러 조직에서 신념처럼 받아들여진다.

미국 역사학자 제리 멀러는 저서 《성과지표의 배신》에서 성과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분석했다. 저자는 “현대 사회가 성과를 수치화하는 데 집착하면서 측정 자체가 목적이 돼 버린 사회로 변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성과를 측정해 공표하고 보상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측정 강박’이라고 정의한다. 저자는 “조직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경영진이 판단을 하기 어려워지자 숫자와 데이터에 기반한 성과 측정지표에 의존하는 사례가 잦아지면서부터 측정 강박이 심화됐다”고 말한다.

측정 강박의 부작용과 정보 왜곡은 교육, 의료, 비즈니스, 금융, 정부, 경찰, 자선단체 등 다양한 유형의 조직에서 나타난다. 사립대 학과장 시절 저자는 대학 업무 가운데 중미고등교육위원회(MSCHE)라는 평가기관에서 제시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한 일이 과도하게 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의료분야에서도 ‘사망률’이라는 데이터가 중요한 의료평가지표로 쓰이면서 병원들은 위험한 환자의 수술을 기피하는 현상을 보였다. 경찰도 ‘범죄 발생률’을 낮추기 위해 실제 범죄를 신고하지 않거나 경범죄로 처리하는 등 데이터를 왜곡해왔다. 저자는 “이처럼 정량적 측정과 계량화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부작용이 생긴다”며 “측정지표는 측정하기 쉬운 것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기에 단기 성과주의에 매몰되게 한다”고 설명한다.

성과급을 채택한 기업의 직원들은 평가지표에 해당하는 업무에만 열중하고, 할당량 압박을 받는 은행 직원들은 사기거래나 불법행위에 눈을 돌리기 쉽다. 성과 측정은 중요하지만 평가 기준이 되는 표준 지표가 만들어낸 결과에 따라 보상과 처벌을 받는 시스템은 구성원들의 시야를 좁힌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평가 기준을 맞추는 데만 급급하면 조직의 목표와 장기적 전망, 조직의 혁신과 장래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창의성, 팀워크, 멘토링과 같은 가치는 자연스럽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