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운명의 한 해가 시작됐다. 지난 7일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신년사는 집권 4년차 국정운영 방향을 담았다.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촛불시위를 주요 사건으로 꼽으며 이를 관통하는 이념으로 ‘민주’를 지적하고 ‘민주공화국 정신’을 강조했다. 그러나 ‘민주’만 있고 ‘자유’는 없었다.
신년사는 자유가 없는 평화란 감옥의 구속과 같고, 자유가 없다면 정의로움은 실현 가능하지 않으며, 자유가 없다면 행복을 찾을 자유조차 없음을 잊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는 자유의 정체성이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는 일제로부터 민족의 자유를 찾는 노력이었고, 4·19와 5·18은 독재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찾으려는 시민투쟁이었다. 언급조차 되지 않은 6·25전쟁은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한 목숨 건 싸움이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민주화’ 투쟁의 목표는 ‘자유’다. 절대 왕정과 전체주의 정권에서 민주의 도달점은 시민의 자유 확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의 확장을 위한 이념이며, 사회민주주의는 사회라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이념이고, 인민민주주의는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통치체제다. 이렇게 민주는 그 앞에 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민주를 여섯 차례나 언급하면서 자유는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반쪽짜리 역사관이다. 정의·평화·공정은 진보이념으로 보지만 자유는 보수이념으로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자유의 정체성을 지우고 싶기에 ‘자유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자유는 인류 발전의 핵심 조건이다. 그럼에도 서구와 달리 우리는 시민혁명이 탄생시킨 자유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충분히 누린 적이 없음에도 정의와 공정을 우선하는 ‘민주화’로 인해 ‘자유화’가 사라졌다. 이 때문에 자유의 실종으로 창의와 혁신이 지체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택시기사의 기득권이 먼저라서 우버나 타다의 혁신은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주 52시간 노동 규제는 더 일하고, 더 벌고 싶은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지만 ‘노동 정의’ 때문에 안 된다. 왜 주 52시간은 정의인데, 53시간은 정의가 아닌지 설명 불가다. 이렇듯 자유와 창의와 혁신이 말살되고, 산술적 평등만 남았는데도 신년사에는 ‘4차 산업혁명 선도’와 ‘혁신’ 구호가 난무한다.
그런데 자유가 빠진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는 안녕하신가? 미국 하버드대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 수호에 핵심 역할을 하는 두 가지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들고 있다.
이 잣대로 보면 현 정권은 모두 실격이다. ‘상호 관용’이란 정치적 상대를 공존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폐청산 수사와 선거법 개정·공수처 신설 법안 밀어붙이기는 관용이 아니라 극한대립의 정치를 불렀다. ‘1+4 정당 공조’는 정당지도자 간의 합의를 당론이라는 명분으로 반대의 자유조차 내부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야권의 보수대통합 시도도 민주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특정 정치인들이 선거 승리를 위해 서로 다른 입장을 두루뭉술 섞어 표를 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논리도, 원칙도, 감동도 없다.
‘제도적 자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민주주의가 붕괴하지 않으려면 법적으로 권리는 있지만 사법부에 정권에 우호적인 인사만을 임명하지 않는 ‘자제’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견제와 균형’의 한 축인 사법부는 정치적 중립이 생명과도 같은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대법원 판사, 헌법재판소 재판관, 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내편’ 임명과 최근 법무부의 검찰 인사는 민주 파괴의 사례로 정치학 교과서에 실릴 수준이다.
한국 정치를 보면 정당들의 야합이 오래간 적이 없고, ‘빅텐트 짬뽕’ 정당이 개혁적인 적도 없다. ‘1+4 공조’는 끼리끼리 합의보다 국민 설득을 우선해야 하고, 보수는 모여서 잡탕 만들기가 아니라 수준 높은 정책과 원칙으로 수권정당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진보는 자유를 품고, 보수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