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앞에 앉은 승객이 일어난다. 웬만하면 서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저만치 있는 할머니에게 권했다. 그 전부터 화난 기색이던 노인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의자를 낚아챘다. 어리둥절했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있는데, 할머니 옆의 중년이 일어난다. 이번엔 이쪽에 선 할아버지에게 양보했더니 헛기침 한 번 없이 냉큼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몇 분쯤 지났을까, 먼저 앉은 할머니가 다시 등장했다. 통화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아무래도 지나치다 싶어 미소를 머금고 말을 건넸다. “어르신, 집안 이야기를 남들이 다 알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은 상상에 맡긴다. 크게 망신당할 뻔했다는 정도만 말해 두자.
재작년에 ‘지공거사(地空居士, 65세가 되면 지하철을 공짜로 탄다고 해서 생긴 말)’가 됐다. 잠깐 쓸쓸하기도 했지만, 지하철로 출퇴근할 만큼은 건강하니 감사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푼돈에 불과할지라도 그조차 중한 어려운 노인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공동체의 가치와 지향에 관한 무거운 질문 앞에 옷깃을 가다듬는다.
노인들은 지독한 세월을 살았다. 식민지를 벗어났지만 이내 전쟁은 금수강산을 피로 물들였다.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독일 광산의 캄캄한 갱도에서, 불타는 중동의 사막에서 돌과 모래를 씹었다. 자식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무릎이 꺾이는 나날을 모아 수많은 우골탑을 쌓았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격렬한 투쟁을 거쳐 대한민국은 민주화와 산업화의 성공 모델로 세계의 부러움을 사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풍요는 노인들의 청춘을 갈아 넣은 결과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나를 포함한 노인들이 스스로 강변하는 방식이라면 귀는 열리지 않는다.
청년 세대가 진심을 담아 먼저 말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손을 내저으며 ‘요새 너희가 힘들지. 우리는 괜찮다’고 말하는 노인을 그려 보자. 품격은 스스로 피어나는 무엇이다. 노인 세대가 전할 것은 흘러간 시간 자체가 아닌, 원숙한 겸손과 배려, 깊은 경륜이어야 한다. ‘당연히’가 베푸는 쪽의 언어일 때, 받는 편의 ‘천만에’ 사이에 소통의 공간이 형성된다.
몇 살부터 노인이고, 젊은이는 누구인가. 노인에게도 선배가 있을 수 있다. 끝없는 역사 속에서 노인은 조금 앞서 나이 든 청년일 뿐이다. 경륜과 패기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세상을 꿈꾼다. 노인과 청년은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다. 미워하며 살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
운전을 대신하는 직원에게 미안해 오늘도 지하철로 출근했다. 삶은 일상의 작은 순간들로 짜인 모자이크다. 전체는 어렵지만, 누구나 개개의 조각 정도는 빛나게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