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9일 국회 정상화에 극적으로 합의하면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과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처리를 둘러싼 파국은 피하게 됐다.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된 후 한 시간 반 만에 여야 3당이 신속한 주고받기식 협상을 통해 절충점을 찾은 것이다.
일단 법정 처리시한(12월 2일)을 훌쩍 넘긴 내년도 예산안과 ‘데이터 3법’을 비롯한 민생·경제 법안 등 ‘급한 불’부터 끄기로 하면서 정치권에 쏟아진 여론의 따가운 눈총도 피하게 됐다. 다만 패스트트랙 법안에 대한 재협상은 난항이 예상돼 연말 국회가 또 한 번 요동칠 가능성도 있다.
513兆 예산안, 1주일 넘겨 처리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심재철 한국당,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이날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로 회동한 뒤 5개 항의 잠정 합의문을 내놓았다.
한민수 국회 대변인은 회동 후 브리핑에서 “예산안 심사는 오늘부터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민주당·한국당·바른미래당 간사 간 재심사를 벌인 뒤 10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여야 3당 예결위 간사는 이날 오후 예산안 수정을 위한 예결위 ‘소(小)소위’를 재가동했다.
민주당은 지난주부터 한국당을 제외한 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과의 ‘4+1’ 협의체를 통해 예산안 심사를 벌여 왔다. 4+1 협의체는 한국당과 바른미래당 원내 지도부를 배제한 상황에서 513조5000억원 규모 예산안 중 1조2000억원을 감액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당이 막판 심사 관련 협상에 참여하면서 감액 규모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국당은 내년도 예산안을 500조원 밑으로 깎겠다고 공언해왔다. 그러나 총선을 5개월 앞두고 당내 의원들이 줄줄이 지역 민원성 예산을 대거 끼워 넣으면서 4+1 협의체 안(案)보다 금액이 크게 줄어들진 않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이 원내대표는 이날 “교섭단체 3당 간 합의는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 예산안 합의 처리를 시도하는 것이지, (4+1 협의를) 무위로 돌리는 과정은 아니다”고 말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예산 총액 증감 여부와 관계없이 여야가 정쟁에 몰두하느라 사상 최대 규모 예산안을 ‘날림 심사’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데이터 3법 등 민생 법안도 늑장 처리
민주당은 당초 이날부터 이틀간 처리하기로 했던 공직선거법 개정안 등 패스트트랙 4개 법안의 국회 본회의 상정을 보류했다. 한국당은 지난달 29일 본회의에 오른 199개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철회하기로 했다. 양당은 두 가지 합의 사항이 이행되는 것을 전제로 데이터 3법과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 ‘민식이법’(도로교통법 개정안) 등 민생·경제 법안을 10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다만 한국당 원내 지도부는 여야 예결위 간사 간 예산안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필리버스터 철회를 비롯한 잠정 합의 사항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방침이다. 심 원내대표는 이날 잠정 합의안 추인을 위한 당 의원총회가 끝난 뒤 “예산안에 대한 합의가 잘 이뤄져야 다른 모든 합의 사항도 잘 풀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의총에선 “예산안 관련 협의 시간이 하루도 채 남지 않았는데 제대로 된 심사가 이뤄질 수 있겠느냐”는 의견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패스트트랙 4법은 협상 재개키로
선거법 개정안과 ‘검찰 개혁’ 법안 등 패스트트랙 4법은 여야 간 협상을 거쳐 이달 중 본회의 상정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황교안 대표, 심 원내대표 등 한국당 지도부가 패스트트랙 법안을 워낙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협상이 순조롭게 이뤄질지는 불투명하다.
이와 관련해 4+1 협의체는 이날 회의에서 선거법 개정안을 ‘250(지역구)+50(비례대표), 연동률 50%’ 안으로 수정하는 데 의견을 어느 정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225+75, 연동률 50%’의 원안에서 한 발 물러난 절충안이다. 막판 쟁점은 ‘연동형 캡(cap)’과 석패율제 도입 여부다. 민주당은 비례대표 50석 중 25석에만 50% 연동률을 적용하는 준(準)연동형으로 배분하고 나머지 25석은 현행 선거법처럼 병립형으로 배분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정의당과 평화당 등은 완강한 반대 의견을 보이고 있다. 지역구에서 아깝게 당선되지 못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당선될 수 있게 하는 석패율제 도입 역시 변수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의원은 “석패율제를 권역별로 할 것인지 아니면 전국 단위로 통합할 것인지 논의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권역별, 군소 야당은 전국 단위 석패율제를 각각 주장하고 있다.
하헌형/조미현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