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찢고 붙이고 잇고…평면회화의 입체 파노라마

입력 2019-10-15 17:14
수정 2019-10-16 03:15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신성희 화백(1948~2009)은 한평생 평면 회화의 혁신을 추구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직후 파리로 건너간 그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회화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평면 그림의 한계에 도전했다. 캔버스에 대한 실험을 거듭한 끝에 1990년대 중반부터 화면을 찢어 새롭게 구성하는 작품을 내놨다. “나의 그림은 찢어지기 위해 그려진다”고 말했던 신 화백의 회화 정신은 단번에 파리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파리의 10대 화랑인 보드앵 르봉갤러리는 그를 전속작가로 전격 끌어들였고, ‘마티에르 작가’라는 별칭도 얻었다.


오는 31일까지 서울 삼청로 갤러리 현대 구관(현대화랑)에서 열리는 ‘신성희’전은 평면 회화의 입체성에 매달리다 세상을 떠난 전업 작가의 혁신적 삶이 얼마나 치열할 수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1, 2층 전시장을 채운 1990년대 작품 30여 점은 평면과 입체의 통합을 시도한 실험정신과 함께 인문학 견해, 창의적 열정으로 중첩된 색채 철학으로 알차다. 30년 이상 고집과 끈기로 일궈낸 ‘신성희표 그림’은 한국보다 유럽 화단에서 먼저 우수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1990년대 유럽 화단을 깜짝 놀라게 한 신 화백의 ‘연속성의 마무리’ 연작은 해체와 구축이라는 흥미로운 제작 과정을 과감히 시도한 게 특징이다. 추상적인 회화를 완성하듯 ‘그림 그리기’ 작업에서 출발하지만 어찌 보면 그의 평면회화 입체화 작업은 너무나 간단하다. 우선 천에 유채와 아크릴 물감으로 색점을 찍거나 물감을 뿌려 추상화처럼 꾸민다. 화려한 색깔로 단장된 캔버스를 1~2㎝의 가는 끈이 되도록 길게 잘라낸 다음 그 조각을 아이들이 딱지를 엮듯 씨줄과 날줄로 다시 결합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띠 조합을 ‘연속’해서 캔버스에 이어붙여 마치 띠들이 화면에서 뚫고 솟아오른 것처럼 작품을 ‘마무리’한다. 화면엔 찢겨진 조각들로 인해 수많은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통해 그림자가 생겨 평면 공간에 대한 의미를 새겼다.

신 화백은 생전에 “찢는다는 것은 이 시대 예술에 대한 질문이며 그것이 접히고 묶이는 것은 곧 나의 답변”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캔버스를 찢고 묶는 것이야말로 평면은 평면답고, 입체는 입체답고, 공간은 공간답게 하기 위한 결합이라는 생각에서다. 캔버스를 파편으로 조각내어 ‘죽인’ 뒤 이를 재조직해 새로운 의미 공간으로 ‘되살린’ 것이다.

신 화백의 이런 작업이 탄생하기까지 10년 단위의 진화 과정을 거쳤다. 1970년대에는 마대 위에 마대 세부를 극사실적으로 재현하거나 캔버스의 앞과 뒷면을 한 화면에 결합한 모노크롬 회화를 제작했다. 1980년대 들어 채색한 판지를 무작위로 찢고 이어 한 화면으로 붙이는 콜라주 회화를 내보였다. 1990년대 ‘연속성의 마무리’ 연작은 2000년대에 색띠를 엮어 화면에 ‘그물망’을 구축하는 ‘누아주’ 연작의 바탕이 됐다. 그의 작품들은 몸은 떠났어도 마음은 아직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시간이 끊겨진 공간에 놓여 있다. 온몸의 세포가 열리는 공간에서 그림을 통해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그의 이야기들이 마치 가을 낙엽처럼 가슴 한편에 쌓인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