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안팔려요"…꽁꽁 얼어붙은 미술시장

입력 2019-09-08 18:31
수정 2019-09-09 01:16

국내 경기침체 신호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글로벌 경기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미술시장이 꽁꽁 얼어붙고 있다. 8일 미술계에 따르면 국내 미술시장의 ‘맏형’인 서울옥션이 2분기 영업적자를 낸 데다 경매 낙찰총액의 약 50%를 차지하는 홍콩 시장마저 시위로 불안해지면서 하반기 실적도 낙관하기 힘들어졌다. 서울 인사동, 청담동 등 화랑가에는 미술 애호가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매출이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 일본의 수출규제와 같은 정치·경제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미술시장의 변동성이 커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추석 이후에도 미술시장의 침체가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이런 ‘한파’가 지속될 경우 지난해 4000억원대로 올라선 국내 미술시장 규모가 올해 다시 3000억원대로 주저앉을 것으로 내다봤다.

서울옥션, 2분기 8억원 영업손실

서울옥션은 지난 2분기 연결 기준으로 8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1분기에도 전년 동기 대비 98% 감소한 2336만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는 데 그쳤다. 지난 4일 가을 경매에서도 예술건축물 ‘딸기테마파크’가 유찰되는 등 낙찰총액이 목표액의 절반 수준(54억원)에 머물렀다. 서울옥션은 ‘적자 쇼크’로 주가 하락폭을 키웠다. 지난 6일 코스닥시장에서 이 회사 주가는 5970원에 마감했다. 최근 1년 새 최고점이었던 작년 10월 4일(1만6350원)보다 63.5% 급락했다. K옥션도 작년 말 80% 가까이 근접하던 낙찰률이 지난 7월 경매에서는 71%(낙찰총액 70억원)로 내려앉았다.

두 회사의 실적 부진은 고스란히 경매 낙찰액 감소로 이어졌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에 따르면 서울옥션을 비롯해 K옥션, 아이옥션 등 8개 경매회사의 올 상반기 낙찰총액은 전년 동기(1030억원)보다 24% 줄어든 826억원으로 집계됐다.

서울옥션은 올 상반기 부진한 실적을 만회하기 위해 다음달 5일과 오는 11월 말 열리는 홍콩 경매에 사활을 걸고 있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일명 송환법)’을 공식 철회했음에도 시위대가 시위를 멈출 수 없다고 밝힘에 따라 홍콩 사태가 가을 경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K옥션은 24일 여는 가을 경매에 유명 화가들의 수작을 대거 끌어들여 낙찰액 제고에 ‘올인’한다는 복안이다.

화랑업계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국제갤러리의 지난해 매출(371억원)은 3년 전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고, 갤러리 현대와 가나아트센터 매출도 200억~300억원대로 부진했다. 인기 화가들이 경기침체에 따른 판매 부진을 우려해 전시회를 꺼린 데다 김환기와 단색화 열풍 이후 이렇다 할 후속 테마주가 없는 것이 매출 급감의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임차료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개점 휴업’ 중인 일부 군소 화랑은 한국국제아트페어(9월 25~29일)를 비롯해 아트광주(9월 19~22일), 대구아트페어(11월 13~17일), 서울아트쇼(12월 21~25일) 등 아트페어에 집중한다는 전략이다. 손성례 청작화랑 대표는 “전시 성수기인 가을에 대부분 화랑이 기획전 하나 제대로 열지 못하고 있다”며 “소장품전, 전시장 임대, 지명도가 높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전 등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도 미술품 컬렉션·전시 지원 축소

전문가들은 미술시장 침체의 주요 원인으로 삼성을 비롯해 SK, 금호아시아나, 대림산업, 현대자동차, LG 등 대기업이 미술품 컬렉션이나 전시 지원 프로그램을 축소한 것을 꼽고 있다. 기업들의 지난해 미술·전시분야 지원액(169억9800만원)은 전년 대비 4.3% 감소했다.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여러 악재도 있어 기업의 미술품 구매가 확실히 꺾였다”며 “1년 넘게 개점휴업인 삼성미술관 리움의 빈자리가 너무 큰 것 같아 걱정이 많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기업들이 그림을 사는 정책적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도 “정부가 작년 4월 미술시장 규모를 3964억원에서 6000억원으로 키운다는 목표를 잡고 ‘미술 진흥 중장기 계획’을 발표했음에도 시장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며 “미술품 구입에 대한 법인세 공제한도 설정, 상속세의 그림 물납제 등 각종 세제 지원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