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하다. 월 1,500대를 외쳤던 자신감은 조금씩 사라지고 지금은 800대로 줄었다. 그랜저 판매의 20%만 옮겨와도 1,400대인데, 1,000대를 넘기란희망사항이 되가는 것 같다.아직 성공과 실패를 재단하기 이르지만 추세를 보면 회복이 쉽지 않아 보인다. 현대차 전륜구동 최고급 세단 '아슬란(ASLAN)' 이야기다.원인을 분석하려면 배경 파악이 우선이다. 먼저 아슬란이 나오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확실한 것은 그랜저와 제네시스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이다. 촘촘한 제품 그물망을 쳐놓고 수입차로 빠져나가는 소비자를 잡으려는 현대차가 그랜저와 제네시스 사이의 넓은 그물코를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단순히 그랜저보다 좋다고 하면 소비자 반향이 없을 것 같아 전륜구동에 제네시스에 포함된 각종 첨단 기능을 담았고, 차명도 그랜저를 멀리하기 위해 '아슬란'으로 정했다. '현대차 최고급 전륜구동 제품', 아슬란이 나오게 된 이유다.
초기에 관심은 높았다. 하지만 주목도는 곧 떨어졌고, 지금은 고민 유발 차종으로 가기 직전이다. 그렇다면 관심 하락 이유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먼저 아슬란은 그랜저 뼈대에 제네시스 상품성을 입힌 제품이다. 여기서 중요 포인트는 '그랜저 뼈대'라는 점이다. 이미 출시 전부터 그랜저 기반임은 알려져 왔다. 심지어 개발코드명도 그랜저는 'HG', 아슬란은 'AG'였다. 그러니 당연히 그랜저 파생 제품임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현대차는 이 점을 감추고 싶었다. 회사의 주력 차종으로 올라선 그랜저 판매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랜저 수요는 유지한 채 아슬란이 새로운 틈새의 개척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현실은 척박했다. 특히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그랜저 뼈대' 사실은 출시 전부터 회자됐다. 그래서 소비자는 '그랜저 뼈대'라 해도 그랜저와 차별되는 무언가를 원했다. 현대차는 그 부분을 제네시스에 버금가는 상품성으로 판단했지만 소비자는 달랐다. 아슬란만의 독창적인 제품력을 원했다.그럼 아슬란의 독창성이란 무엇일까? 현대차는 아슬란에 '최고급 전륜구동'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최고급'이란 누누이 강조했지만 제네시스의 상품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랜저 고급형에도 있을만한 기능은 모두 들어 있다. 물론 헤드업 디스플레이 등이 없지만 반드시 필요한 기능은 아니다. 그러니 차별화 요소가 되지 못한다. 그럼 대체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8단 변속기를 언급한다. 현재 6단에 머문 그랜저와 달리 아슬란에 8단이 올라가야 비로소 '차별화'를 붙일 수 있다고 말이다. 게다가 제네시스도 현재 8단 후륜 변속기가 탑재돼 있다. 제네시스의 상품성을 아슬란에 옮겨 왔다면 아슬란 또한 제네시스에 버금가는 8단 전륜 변속기를 사용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8단 전륜 변속기는 같은 엔진의 '그랜저 뼈대'지만 소비자들이 그랜저 파생 차종으로 인식하는 것을 막는 역할이다.
또 하나는 향수에 대한 자극이다. 지난 1996년 현대차는 2세대 그랜저 파생 차종으로 다이너스티를 내놨다. 당시 다이너스티에는 V6 3.0ℓ와 3.5ℓ 엔진이 탑재됐다. 이 가운데 3.5ℓ 엔진은 다이너스티의 등장과 함께 그랜저에서 내려왔다. 1999년 에쿠스가 나오기 전까지 현대차의 최고급 전륜구동 세단으로 지위가 확고했다. 하지만 에쿠스 등장 이후 2005년까지 나름의 지위를 유지했다. 다이너스티를 떠올리며 그랜저를 연상하는 소비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이너스티의 단종은 제네시스의 역할이 컸다. 제네시스를 부각시키기 위해선 다이너스티의 단종이 필요했고, 덕분에 원래 개발중이던 후속 차종은 훗날 기아차 오피러스로 등장했다. 현대기아차로선 '그랜저(현대)-오피러스(기아)-에쿠스(현대)'로 연결되는 고급 전륜 구동 제품군을 확보한 셈이고, 제네시스는 K9과 함께 후륜 구동 기반의 프리미엄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견뎌 낸 다이너스티의 생존 기간이다. 이 당시 다이너스티는 하이 오너 세단으로, 50-60대 사이에서 꽤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주력은 50대였다. 그들은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중반의 자녀들과 함께 최고급 승용차를 탄다는 자부심을 느꼈고, 다이너스티는 만족감을 부여했다. 그리고 아슬란이 등장할 때까지 18년이 흘렀다. 동시에 현대차는 아슬란의 주력 타깃으로 40-50대를 설정했다. 18년 전 다이너스티 뒷좌석에 탔던 이들을 주력으로 겨냥한 셈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다이너스티는 자부심이었고, 곧 성공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이너스티' 차명을 부활시키는 게 훨씬 유리했을 것이란 아쉬움이 적지 않다. 게다가 당시 다이너스티 또한 '그랜저 뼈대'가 활용됐지만 전혀 별개로 인식됐던 사례도 참고했어야 했다. 아슬란 고유의 브랜드 정체성을 가져갈 수 있는 기회가 충분했지만 현대차 스스로 외면한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물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게 나아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새로움을 원하는 소비자는 너무 많이 넘쳐난다. 현대차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해 다이너스티 대신 아슬란을 선택한 배경이다. 하지만 시장의 포화는 감안해야 했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중대형 프리미엄 고급차 시장의 수요층은 수입차와 국산 고급차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수입차는 새로움이지만 다이너스티는 새로움과 예스러움을 동시에 잡는 전략으로 삼기에 충분했다는 얘기다. 반박도 있을 것이다. 만약 8단 변속기와 다이너스티 차명을 썼음에도 아슬아슬 줄타기를 했다면 오히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지 않아 지적받을 수 있다. 그래서 거듭 말하건대 8단 변속기와 차명이 아슬란의 아슬아슬 줄타기의 명확한 이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은 지금의 아슬아슬 줄타기가 '그랜저 뼈대'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타난다는 점이다. 만약 그랜저와 차별화에 성공했다면 아슬란의 입지는 과거 그랜저-다이너스티-에쿠스' 때와 비슷했을 것이다. 당시와 달리 지금은 제네시스라는 명실상부한 프리미엄 후륜구동이 있어 아슬란의 지위가 흔들린다고 해명할 수 있지만 제네시스는 이미 별도의 프리미엄 제품 브랜드로 시장에 안착했다. 한 마디로 아슬란은 성격이 다르다는 의미다. 그래서 아슬란의 아슬한줄타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권용주 선임기자 soo4195@autotimes.co.kr▶ [칼럼]현대차, 미국서 픽업트럭 현실화 한 이유▶ [칼럼]구애하는 FCA, 새침한 GM 그리고 현대·기아차▶ [칼럼]자동차에서 LG와 삼성이 다른 점▶ [칼럼]중국차의 추격이 두려운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