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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영락제와 엔히크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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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영락제와 엔히크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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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중국대륙 지배를 회복한 명(明)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 영락제는 중국사를 통틀어 한족 황제 중 가장 두드러진 정복 군주다. 원(元)과의 패권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역대 중국 황제가 아니라 쿠빌라이 칸을 롤 모델 삼아 원제국의 영토와 위엄 재건을 국가 목표로 정했다.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을 다섯 차례나 친정(親征)하는 한편, 1405년 정화(鄭和)를 사령관으로 한 대규모 함대를 파견해 동남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까지 원정했다. 정화함대는 배 62척과 2만7000명으로 구성됐고, 배의 크기는 무려 길이 130m, 폭 50m에 달했다고 《명사(明史)》에 기록돼 있다. 기착지마다 중국어, 페르시아어, 현지어로 비석을 세워 명의 위대함을 기록했고 적대적 행동을 보이는 일부 현지세력을 무력 제압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앞선 문물을 전파하고 조공을 약속받는 등 상징적 활동에 집중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레콩키스타(Reconquista) 과정에서 독립한 포르투갈은 명나라 건국 무렵 주앙 1세가 아비스 왕조를 열었다. 동쪽은 강대국 카스티야, 서쪽은 대서양에 가로막힌 약소국 포르투갈은 경제적 자립과 생존 위협에 직면해서 바다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지중해 밖 바다에 대해 무지하고 큰 배의 건조 기술이 없던 유럽인들에게 대서양은 죽음의 바다로 여겨졌으나, 주앙 1세의 삼남 엔히크 왕자는 유럽대륙의 땅끝 사그레스에 항해학교를 세우고 유럽 및 이슬람 각지에서 항해, 지리, 천문, 조선 전문가를 끌어모았다. 배를 개량해 작은 범선 캐러벨을 만들었고, 기사들은 기꺼이 말을 버리고 배에 올랐다. 조악한 배와 항해술, 괴혈병으로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마침내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정화함대가 아프리카를 다녀간 지 8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비교도 안 될 규모와 기술로 훨씬 앞서 동서항로를 열었던 영락제의 동기는 정치였다. 황제의 위엄을 널리 떨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보니 그의 사후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원정사업은 폐기됐다. 반면 포르투갈인들이 죽음을 무릅쓴 동기는 향료, 차, 비단 같은 사치품과 노예 획득이었다. 제국의 영광에 비하면 세속적이고 천박한 경제적 동기의 생명력은 질겨서 엔히크 사후에도 항해는 계속됐고, 전 유럽으로 확산돼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위라는 결과를 낳았다.

진귀한 것을 소유하고 남보다 좋은 집에 살고 싶은 욕망을 비난하고 정책으로 막는 것은 단기적으로 가능하다. 숭고해 보이는 이상과 정치적 동기를 앞세우는 일이 고결하고 멋져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바꾼 처절한 혁신과 목숨을 건 도전은 대개 이기적 동기와 경제적 욕구에서 출발했다. 더구나 현실적 동기로 무장한 적들에게 명분과 이상론으로 대응한 결과의 애석함을 역사는 수없이 보여준다. 신냉전 시대 우리가 되짚어 볼 세계사의 대조적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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