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빛을 찾은 주인공 필립, 그는 '우리'
(17)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의 대표작 《인간의 굴레》는 《달과 6펜스》와 함께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다. 불우한 환경과 장애라는 이중고 속에서 스스로 굴레를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든 굴레 속에 빠져 들어가기도 하는 주인공의 삶은 100년이 지난 현재 젊은이의 행보처럼 생생하다.
1915년 발간된 이 작품은 분량이 많아 두께나 가격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몸은 “소설가는 자기의 생활을 위해서 일하는 직업이므로 그가 글을 쓰는 시대의 일반적인 출판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다”며 1950년 축약판을 냈다.
그는 이 작품을 사무엘 버틀러의 《인간의 길》에 영향을 받아 쓴 반(半)자서전적인 소설이라고 밝히면서 “어차피 소설은 허구이며 그 속에 있는 사실들도 저자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집필과 함께 과거의 괴로운 기억들을 잊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저자 서머싯 몸과 ‘인간의 굴레’ 聆寬?필립은 얼마나 닮았을까. 몸은 8세 때 어머니, 10세 때 변호사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목사인 숙부의 집에서 자란다. 17세 때 하이델베르크대에 유학하고, 18세 때 런던에서 회계사 견습생으로 2개월 근무한 뒤 성 토마스병원 부속 의학교에 입학한다. 23세에 의사 면허를 취득했고, 첫 장편소설 《램버스의 라이자》를 발표한 뒤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동경하던 스페인으로 떠난다. 극작가로도 활동한 그는 1965년 9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했다.
마음이 온통 헝클어지다
《인간의 굴레》 주인공 필립은 발이 굽어 걸을 때마다 쩔뚝이는 장애인이다. 어릴 때 의사였던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를 잃어 목사인 백부 집에 오게 된다. 아이가 없어 필립을 아들처럼 사랑하는 백모와 달리 근엄한 백부와 사는 것이 편치만은 않다.
백부는 조카가 자신을 닮아 목사가 되거나 아버지를 닮아 의사가 되길 원하나 필립은 단호히 거절한다. 독서를 많이 하고 성적이 우수한 필립은 거만하고 예민했으며 상대방의 아픈 곳을 찌르는 신랄한 말솜씨를 지녔다. 다리가 온전해지기만 한다면 가장 우둔한 아이가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필립의 마음은 어릴 때부터 복잡다단했다.
성적이 좋아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에 진학할 수 있었던 필립은 교장과 백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간다. 그곳에서 대학에 잠시 다니다가 런던으로 돌아와 회계사 사무실에서 1년 근무한 뒤 다시 파리로 가서 2년간 그림공부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그림을 그려봐야 이류밖에 되지 못한다는 자각에 필립은 의학교에 진학한다. 필립이 이것저것 시도해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의 유산이 있었다.
필립을 또다시 묶은 굴레는 짝사랑이었다. 밀드레드에게 이용만 당하는 필립의 잘못된 만남은 한심하면서 안쓰럽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자신의 친구와 도망가는 밀드레드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불가항력적으로 빠져드는 필립은 결국 그녀로 인해 무일푼이 되고 만다.
백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고 하루 한 끼밖에 못 먹을 정도의 생활고를 겪으며 자살까지 생각한 필립은 늘 따뜻하게 대해주는 아델리의 도움으로 상점 직원으로 취직한다. 그동안 장애와 여자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라는 굴레를 썼다면 생활고라는 실질적인 굴레 속에서 필립은 성실한 삶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책 속에서 많은 인물을 만나라
필립은 마음으로 경멸했던 백부가 세상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많은 깨달음을 얻고, 결국 백부가 남긴 유산으로 의학교를 졸업한다. 의사가 된 뒤 늘 꿈꿔온 스페인 여행을 떠나는 대신 아델리의 큰딸 샐리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필립에게 이제 굴레 따위는 없다.
필립은 서른 살이 되기까지 반항하고 반발하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너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무엇이 너에게 이로운지 잘 알 수 있다”는 백모의 말에 반감을 느끼고 백부에게 “남의 충고를 따라 옳은 일을 하기보다는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실패하는 편이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들기도 한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나만이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한 필립. 젊음은 길지 않은데 필립처럼 온갖 것을 경험으로 다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필립처럼 유종의 미를 거둘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 과정을 앞서서 경험한 작가 몸의 분신인 필립을 만나 함께 고민한다면 앞날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른이 돼도 콤플렉스에 갇혀 비뚤어진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책 속에서 많은 인물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삶의 지혜를 얻는 길이다.
20세기 영문학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인간의 굴레》를 읽으면서 나는 지금 어떤 굴레에 빠져 있는지, 앞으로 어떤 굴레에 빠지면 안 될지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근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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